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도종환
산벚나무 잎 한쪽이 고추잠자리보다 더 빨갛게 물들고 있다 지금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고 있고, 내 인생의 시간은 오후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에 와 있다 내 생의 열두시에서 한시 사이도 치열했으나 그 뒤편은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
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 전까지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번은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 기쁘다
머지않아 겨울이 올 것이다 그때는 지구 북쪽 끝의 얼음이 녹아 가까운 바닷가 마을까지 얼음조각을 흘려보내는 날이 오리라 한다 그때도 숲은 내 저문 육신과 그림자를 내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지난 봄과 여름 내가 굴참나무와 다람쥐와 아이들과 제비꽃을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보낸 시간이 얼마나 험했는지 꽃과 나무들이 알고 있으므로 대지가 고요한 손을 들어 증명해줄 것이다
아직도 내게는 몇 시간이 남아 있다
지금은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언젠가 블로그에 썼지만 네시 근방은 유년기의 나에겐 늘 수수께끼 같은 시간이었다. 낮이라고 할 수도 없고 저녁이라도 할 수도 없는, 괴상할 정도로 길게 일그러진 그 햇살을 노곤하다고 해야 할지 아름답다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던 기억. 오전 오후반 수업이 있을 땐 오후반 수업이 끝나던 시간, 오전반이 끝나고도 피아노-미술-태권도의 삼단 콤보를 끝내고 도장의 친구들과 몰려다닐 때 마주하던 그 시간, 고학년 때도 수업을 마치고 잠깐 아이들과 어울리다 정신을 차렸을 땐 운동장엔 얼굴이 다 탄 야구부 녀석들 말고는 아무도 없어 적막하기만 하던 그 시간
중학교 때는 학교 수업이 끝나고 교육청 심화반 수업을 가기까지 기다리던 때가 딱 그 시간이었다. 혼자 하늘을 물끄러미 보다 보면 붉게 물든 해는 아주 서서히 회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는데, 대도시라는 대구에서부터 생긴 하늘 보는 습관은 서울의, 밤이 되도 붉은 하늘에 길들여지기 전까진 계속 됐다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에
동네 아주머니들은 끼리끼리 둘러앉아 시댁과 동네 사람들 흉을 보면서 팔불출 자식 자랑을 하며 한참 떠들던 걸 털어내며 저녁을 준비하러 가고, 노동자는 하루 일을 정리하며 마지막 힘을 쏟거나 지쳐있거나 한 상태로 일터를 지킨다. 학교를 마친 아이들은 저녁 먹으라고 엄마가 찾아오기 전까지 놀이터에서 마지막 기세를 살려 놀고 있었다
내 생은 팔십을 사는 인생 시계에선 오전 여덟시 반 정도
시에 따르면 아직 치열하기도 전인, 아침을 먹는 또는 먹은 시간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에 문인에서 정치인으로 변모한 이 시인 또래가 겪는 시간의 감각을 이해한다고 하면 무례한 일일 텐데도
그렇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가장 빛나는 그 신비한 하늘은 늘 내 속 어딘가 각인돼 있었으요... 뭔지는 잘 몰랐지만, 지금도 모르지만, 해가 저물고 나서야 깨달을 어떤 이유 때문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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