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략
축제 시즌에는 데모를 하지 않는다. 우리의 꽃다운 젊음에 스스로 축배를 들기만으로 충분히 바쁜 까닭에 축제를 앞두고는 미팅이 성행하지. 우린 공돌이 공순이가 아니니까. 대학생에겐 낭만이 있어야 하니까라면서, 제비뽑기에서 걸린 파트너 앞에 앉아 발정기의 동물들처럼 수작을 벌였다. 진실한 사랑이고 개뿔이고 간에 우리는 좀 더 아슬아슬한 연애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다.
개강이며 종강 파티, 야유회, 봄·가을엔 야구장엘 몰려갔고, 경기가 없을 때면 우리끼리 체육 대회를 가졌지만 교수들은 용케도 그 틈틈이에 시간을 잡아 끈기 있게 강의를 진행하였다. 빈틈없이 평가를 해서 귀신처럼 학점을 매겨주었다. 뿐만 아니라 야망을 가지고 인생을 설계하라고 가르쳐주셨다.
나는 다 싱거워져서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그 대신 구두닦이가 되었다. 구두닦이란 비록 남의 구두에게일망정 침을 뱉어가며 돈을 버는 유일한 직업이었다. 길 건너 이발소의 주인은 나를 부를 때 '딱세야'하고 소리쳤다. 나는 하루 종일 침을 뱉는 것이 재미있었다. 밤이면 본토박이 구두닦이들과 싸움판이 벌어졌다. 그놈들에겐 생존의 문제였고 우리에겐 생활의 문제였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겼다. 그만큼, 나와 내 친구들은 지겨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대학생이라는 직업이 얼마나 편안한 것인지를 깨달았을 때 나는 대학으로 돌아왔지만, 3년째 여전히 프레시맨이었다. 과를 정외과로 옮겼다.
나는 '우선 징집원'을 제출하였다. 내 또래의 많은 친구들이 그랬듯이 나 또한 군대를 하나의 피난처로 삼을 수 있다고 믿었다. 어디 갈 데까지 가 보자고 생각했다. 살고 있음을 실감해 보고 싶었다. 죽도록 맞고 기다 보면 살고 싶어질지도 몰랐다.
그러나, 전쟁하지 않는 군대란 그렇게 막다른 장소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평화로웠다. 겨울 사과처럼, 총과 대포는 닦을수록 이쁘게 반짝거렸다. 종이 세 번 울리면 식기를 들고 줄을 서서 밥을 더 먹는 것으로 그뿐이었다. 바쁘게 뛰어봤자 매일의 일정한 시간에 맞추어 뛰는 뜀은 뜀이라도 권태로웠다.
군복을 벗자 달리 갈 곳이 없었다. 하고 싶은 일이 없는 것까지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해야 할 일조차 없는 것은 큰 불행이었다. 그런 불행을 안고 나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에 겪은 숱한 역겨움과 망설임, 몇 번인가의 공허한 연애, 묻혀진 하소연들… 나는 절반쯤 어른이 되어 있었고, 차츰 대학생 티가 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버스 차장에게만 떳떳한 대학생이었다. 대학 못 간 친구들 앞에서 커리큘럼을 떠벌릴 때에만 알량한 대학생이었다. 어떤 권위나 결정해야 할 문제 앞에 서면 우리는 이렇게 투덜거렸다. 이제 겨우 대학생인걸요, 힘없고 흔해빠진 대학생 말입니다.
초라한 공범 의식으로 이어진 학교의 친구들끼리는 그저 낄낄거리기만 하였다. 가려지지도 않는 서로의 치부에서 시선을 비킨 채 마냥 낄낄거리기만 하였다. 그럴 때 우리는 무척이나 허전하였다.
나는 청소부 아줌마들을 생각하면 더욱 허전하였다.
술에 취해 교정의 벤치에서 잠들어버린 이른 가을이었다. 갈증이 나를 깨웠으리라. 이슬이 찬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우윳빛 뽀얀 새벽이었고 교정엔 아무도 없었다. 다만 허리를 구부정하게 한 청소부 아줌마들만이 교정을 쓸고 있었다.
새벽 여명 속으로 엿본 이 광경을 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리가 쓸데없이 몰려다니던 발자국들을, 아무렇게나 토해놓은 오물들을 그녀들은 말없이 지워주고 있었다. 마치 우리에게 부끄러운 아침을 주어서는 안되겠다는 듯이.
나는 그녀들을 붙잡고 소리치고 싶었다. 변명하고 싶었다. 우린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구요. 야망을 품을 수도 없었다구요.
하략
-『문학사상』1980.2
김한길 전 국회의원, 대학졸업을 앞두고 쓴 글.
대학시절을 돌아보면 낭만이란 핑계의 허세들일랑 다 무엇이었을까 싶다. 저토록 우울한 건 아니나 다만 부끄러운 마음들이 든다. 마지막 같은 변명의 문장들을 나는 남기고 싶지 않다.
희망을 노래할 수 있도록, 진실하고도 삶을 바꿀 수 있을 희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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