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상략
고남일은 그럭저럭 유쾌하게 살던 사람이었다. 돈도 안 되고 유명하지도 않지만 자신이 만든 밴드에서 열심히 기타를 치고 있었으며 배달 아르바이트로 적당히 버는 생활비는 아쉬울 것 없었고, 사이좋은 애인도 있었고 아직 서른도 되지 않았다는 게 자랑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야말로 되는 일 없는 놈의 견본이 되기 딱 적절한 일들을 한꺼번에 몰아서 겪었다.
'되는 일이 없다'는 표현은 남들에겐 빈번하지 않은 비운의 확률이 자신에게만 집중적으로 발생할 때 쓰는 용어다. 주위의 모두가 연애를 하고 있는데 자신은 연애를 못 하고 있을 때, 아무도 치질에 걸리지 않았는데 자신만 똥구멍에 개떡 같은 게 생겼을 때, 하필이면 우산을 버스에 놓고 내린 순간 폭우가 와서 씨팔 쫄딱 젖을 때, 여유의 극한을 때릴 듯 한적한 도로에 차를 세우고 담배 한 갑을 사고 나왔는데 좆같은 주차위반 스티커가 붙어 있을 때, 급하거나 중요한 약속이 있는데 꼭 지하철이 고장 나고 지랄일 때, 사람들은 되는 일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그에게 전혀 일어나지 않던 일이었다. 그는 뭘 해도 잘 풀리고, 깔끔하고, 충분하고, 갈등이라곤 코딱지만큼도 없는 이십대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십대를 한 해 남긴 막판에 완전 갑자기 되는 일이 콧구멍만큼도 없어지는 날벼락을 맞게 될 줄은 몰랐다.
그는 콧물을 질질 흘리지 않고는 들어줄 수 없는 자신의 최근 일들을 대가리에 떠올렸다.
밴드 연습 뒤풀이로 간단히 술 한잔 마시고 집에 오다, 쩔쩔 매는 어떤 아줌마의 평행주차를 대신해주고 내려서 키를 돌려주는데 마침 지나가던 순찰차에 걸린 게 시작이었다. 입에서 술 냄새가 난다며 단속 장비를 불었는데 위반 수치인 혈중알코올농도 0.05퍼센트를 살짝 오버한 0.051퍼센트가 나왔다. 남을 도우려다 그런 건데도 경찰은 봐주는 법이 없었다. 억울하지만 법을 어긴 거니까 고남일은 깔끔하게 웃어넘겼다. 그런데 약속 장소에 뛰어가다 주차되어 있는 어떤 승용차와 골반뼈가 살짝 부닥쳤는데 사이드미러가 깨져버렸고, 그게 마침 죽도록 비싼 외제차였던 건 웃어넘길 수 없었다. 수리비가 어찌나 비싼지 돈을 탈탈 털어서 물어주느라 똥구멍이 찢어질 뻔했다. 조심하지 않은 자신 탓이라고 생각하고 그는 주의하며 살기로 했다. 그러나 아까운 생돈이 날아간 걸 잊으려고 술 마시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 앉은 모르는 여자가 어떤 남자에게 마구 따귀를 맞기 시작했다. 그는 '여자를 때리는 놈이 다 있어!' 하면서 남자를 제압하고 여자를 구해줬다. 여자를 달래서 택시를 태워 보낸 걸 나름 선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여자는 하필이면 상태가 많이 그릇된 애였고, 다짜고자 찰떡 진공 스토킹을 시작하는 재앙을 부렸다. 어떻게 알았는지 그 넋 나간 여자는 고남일의 밴드가 클럽에서 공연하는 날마다 찾아와서 행패를 부렸고, 휴대폰 번호까지 알아내 계속해서 전화를 하고, 심지어 자기 애를 책임지라고 소리치면서 연습 중인 합주실에 뛰어들곤 했다. 남자에게 맞고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거였는지도 모른다. 맹세코 고남일은 그 여자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걸 오해한 그의 애인이자 밴드의 베이시스트 여자애는 이렇게 말하고 밴드에서 나가버렸다.
"끝이야. 요런 쓰레기 같은 놈."
사랑하는 애인은 그 뒤로 완전히 연락을 끊었다. 실연의 실의에 빠진 고남일이 합주실에 안 나가니까 다른 멤버들이 투덜거리며 딴 밴드로 가버려 고남일의 밴드는 쓰다 버린 반창고처럼 되어버렸다. 그쯤 되자 고남일은 깔끔하게 웃어넘기기엔 뭔가 몹시 개떡 같은 일들이 자신에게 벌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눈치 까게 되었다. 유쾌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는 우울한 막장에 닿을 일이 없다는 철학을 십년째 이어오던 그였지만 그때부턴 삶이 하도 바닥에 질질 끌려 처절하기만 했고 하루 종일 궁상맞은 태도로 살아야 해서 유쾌고 나발이고 암울한 캐릭터가 되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고남일이 일하던 중국집이 미성년자 단속에 걸려 영업정지를 때려 맞았다. 손님이 소주를 달라고 해서 줬고 도저히 미성년자로 보이지 않는 녀석들이었는데 믿기지가 않았다. 무슨 중국집에 미성년자 단속을 나오는 거냐고 화낼 틈도 없었다. 가게 사장이 나타나 도대체 왜 나를 엿 먹이는 거냐며 그의 머리를 개 때리듯 때렸고, 그는 남은 월급도 한 푼 못 받고 쫓겨났다. 고남일은 그때부터 겉늙어 보이는 놈들을 증오하기 시작했는데 음주운전으로 부과된 벌금이 때마침 청구되었고 낼 돈이 없어 노역으로 때웠더니 피부가 흙에서 막 파낸 감자처럼 겉늙어 보이게 되었다.
너무나 짧은 기간에 그런 액운이 소나기처럼 퍼붓자, 그는 유쾌한 성격과 유머감각의 대부분을 상실했다.
응원하는 야구팀은 14연패에 빠지며 단독 꼴찌로 떨어졌고, 그가 지지하던 청렴한 정치인이 검은돈을 받았다는 악랄한 누명을 쓰고 선거에서 참패했다.
그는 인간이라면 이 타이밍에 조금 격하게 좌절해줄까 싶었다. 하지만 비운에 쫄면 비운이 자신을 만만하게 보고 줄기차게 괴롭힐 것 같아 남은 유쾌함을 주섬주섬 끌어모아 다시 시작해보기로 했다.
'운 따위는 신경 끄면 존재감도 없는 거야. 몸 안 아픈 게 어디냔 말이지.'
기가 막히게도 그러자 갑자기 낡은 중고차처럼 몸 여기저기가 고장 나기 시작했다. 충치에 치질에 위염에 결막염에 아오 시바 편두통까지 줄줄이 소시지처럼 꼬리를 물고 찾아왔다. 그는 몸의 수리비를 위해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해야 했다. 되는 일도 없는 몸에 빚낸 돈을 처바르고 있는 자신이 너무 싫었다.
마지막 재앙은 집중호우가 내리던 어느 밤 액운에 지쳐 잠들었다가 입은 수해였다. 그건 싹쓸이 결정타였다. 고남일은 완전히 꼭지가 돌아버릴 지경이 되었다.
'저지대 지하 방도 아니고 노량진 산꼭대기에 살고 있는데 수해라니 말이 되냐.'
그건 집중호우로 옥상에 저수조처럼 고인 물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딱 고남일 방 천장 쪽으로 무너지면서 벌어진 재난이었다. 그는 침대에 누워 자다 그 물을 고스란히 얼굴에 처맞았다. 그는 쏟아지는 물세례에 '끄아아 시빠빠'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지만 대체 어떤 황당한 액운이 더 이어질지 몰라 몹시 두려워졌다. 그는 못 쓰게 된 침대를 쓸쓸히 내다 버리며 심한 우울을 앓게 되었다. 그의 연인과 뼈와 살이 분리되고 영혼이 녹아내리는 사랑을 나누던 추억의 침대였다.
그리고 빌어먹을 서른 살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두려웠고, 아주 궁상맞은 표정을 지으며 살아야 하는 남자가 되었다.
그에게 남은 건 보증금 백만 원짜리 너절한 자취방과 목숨처럼 아껴온 일렉트릭기타, 그리고 주행거리계가 고장 난 낡은 오토바이 한 대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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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보기에 한국 사회란 멋있게 살고 있는 놈을 만날 확률이 높지 않아서 어지간히 멋대가리가 없는 곳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멋지게 해내는 것보단 그걸 꾹 참고 견디면서 당장 눈앞의 생존을 추구하는 게 철든 인간의 바람직한 태도라고 생각하는 듯한 꼬질꼬질한 놈들로 꽉 차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무슨 절대적인 철학이라도 되는 듯 부여잡고 '어떻게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사니?'하며 흐린 눈빛을 전파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만나는 건 지겨운 일이었다.
기타는 그렇지 않았다. 기타는 언제나 '꿈꾸세요~ 꺄륵꺄륵' 하는 소리를 냈다. 고남일은 그래서 기타를 밥보다 좋아했다. 사춘기 때 롹음악을 만난 뒤부터였다. 전설적인 롹밴드들이 가진 위대한 롹정신의 작살나는 파워에 경도되는 순간, 그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임을 깨달았다. 그런데 학업을 포기하고 롹밴드질을 하겠다고 선언하자 그의 집은 미친개가 뜯어놓은 베개처럼 되었다. 어째서 중산층의 평범한 가정에서 너 같은 '돌연변이'가 발생한 거냐고, 그의 부모님은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해 펄쩍펄쩍 뛰었다. 하지만 그는 부모님의 중산층 계급을 유지하는 일엔 관심이 없었다. 그가 생각한 계급은 기타 실력의 레벨이었고 신경은 오로지 꿈꾸는 소리를 내는 기타에 쏠려 있었다.
그것은 기타 소리의 풍부한 울림 때문이었다. 기타의 음색이 끼쳐대는 진동이 고남일의 가슴에 지각변동을 일으켜버린 것이다. 세상 모든 아름답고 신기한 것들을 코앞에 들이대도 기타만큼 그를 매료시킬 수 있는 건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고남일은 생각했다.
매료란 참 멋진 말이다. 제발, 의학이라면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일에 매료된 자들이 하고, 정치라면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일념에 매료된 자들이 하고, 군인이라면 싸워서 이기고 나라를 지키는 일에 완전히 매료된 자들이 해야만 하는 것이다. 공무원은 공공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꿈에 부풀어 오른 자가 하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미칠 것 같은 놈이 검사를 하든 경찰을 하든 해야 한다. 그런 일뿐만 아니라 도어맨이든, 택시 운전이든, 똥 푸는 일이든, 뭐가 됐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야 인생에 매료되는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집에선 기타를 못 치게 하니까 고남일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독립했고, 자유로운 영혼과 인간의 예술적 존엄을 기타로 표현하는 짓에 신명을 다 바칠 태세였다.
하지만 가장 먼저 자신을 가로막은 건 '먹고사는 문제'라는 못생긴 괴물이었다. 그놈은 모질고 징하고 까다롭고 형편없는 녀석이었다. '이거나 먹지 애송이!' 하면서 놈이 휘두르는 '의식주 권법'에 코를 얻어맞아보자 사람들이 왜 이 녀석에게 험한 꼴을 당하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살아가는 건지 대번에 눈치 깠다. 당장 방값을 내야 했고, 밥값과 술값이 있어야 했고, 옷을 사 걸쳐야 했다. 그는 우선 그놈을 제압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놈과 싸우는 동안 고남일의 강렬했던 롹정신은 서서히 희석되어갔다. 정확히 말하면 롹정신 때문에 늘 반항하는 캐릭터로 살다보니 계속 잘리거나 때려치워야 해서 밥 먹고 살기 힘들어서 자신도 모르게 현실과 타협해갔던 것이었다.
민박집 식탁에 앉은 고남일은 기타만 잡으면 불뚝 솟아오르던 짜릿하고 강렬했던 롹정신이 지금은 너무 약하게 감지된다는 걸 느꼈다. 그는 라면 국물을 쓰디쓰게 마셨다.
그렇지만 살면서 기타를 놓으려고 한 적은 없었다. 군대에서도 '고참'이 되었을 때 내무반에 기타를 갖고 들어가 손가락이 녹슬지 않게 연습해뒀다. 롹정신을 대변하는 게 긴 머리칼이라고 믿는 고남일의 스타일을 상관하지 않는 아르바이트만 전전했고, 가장 최근엔 월급 구십만 원짜리 술집 매니저로 일하고 살았다. 롹정신과 '먹고사는 문제'는 함께 섞일 수 없는 원수 같았다. 그래서 둘 다 잘되지 않았다. 먹고살았지만 잘 먹고살진 않았다. 결국은 롹정신 때문에 평범한 일도 못하고, 미래가 없는 일들만 하면서 살고, 여자들도 그의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폭풍처럼 떠나갔지만 정작 '롹정신'은 살아남기 위한 타협을 하는 동안 희석되어간 것이다. 집에 돈이 많은 놈이 아니고서야 추구할 수 있는 정신이 아닌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의 정신에 '뽕'을 놓아주며 빌어먹을 거지 같은 삶이란 걸 지탱하게 해준 것 또한 롹정신인 것 같았다.
그 순간이었다. 고남일은 자신의 가슴을 뜨겁게 해주던 '뽕기'가 자신을 다시 휘감아오는 걸 느꼈다. 런던의 칙칙한 민박집에서 라면을 빨다가 느끼다니 겸연쩍었지만 그 기운은 몹시 반가운 것이었다.
'안녕 친구. 오랜만이다.'
롹정신이 가슴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며 고남일의 뇌리에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 롹정신! 내가 너를 깜빡하고 살았어!"
그 단어를 다시 발음해보자 갑자기 가슴속에서 지잉~ 하는 디스토션 이펙터의 육중한 사운드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아주 미약한 진동이었지만 고남일은 이 멋진 새끼, 하는 벅찬 가슴으로 라면 냄비의 밑바닥까지 핥아 먹은 다음 힘차게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지금껏 가진 게 아무것도 없으면서 롹정신까지 잃었으니 등신 되기 딱 좋았던 거라는 깨달음이 어깨에 척 걸쳐졌다.
라면 냄비를 씻는 고남일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떠나면 돼!' 하고 한국이라는 경계선을 넘어 떠났다. 그리고 진짜 와버렸다. 고남일은 매끈해진 냄비를 노려보았다. 정신이 맑았다.
'이제 롹정신을 부활시키면 돼.'
그 강렬했던 폭발력을 되찾는다면 삶과 죽음과 비운까지도 맘껏 조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멋지게 살고, 안 되면 죽든지, 하면서 그는 가슴에 남은 롹정신을 매만졌다. 그것은 조만간 다시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돌아올 것만 같았다.
중략
로잔나는 영국도 싫고 고남일도 바보 같다며 마구 술만 마셔댔다.
한마디로 한국을 떠나올 때와 비슷한 총체적 난국이었다.
"지겨워 죽겠군. 아무리 몸부림쳐도 역시 벗어날 수 없는 팔자인 건가."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그러나 대책 같은 건 떠오르지 않앗다. 고남일은 한국에서처럼 절망하거나 버럭 진절머리를 내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러기도 지겨웠다. 한국에선 안 되면 떠나기라도 했다. 영국에서도 안 되면 떠나야 하는 건가. 아예 평생 떠나기만 하고 살 거냐. 생각해보니 정면으로 돌파하지 않고 도피하려는 성향이 자신의 롹정신에 위배되는 불경한 마인드로 보였다.
고남일의 가슴속에서 오기와 근성이 치밀어 올랐다.
"내가 씨발 버티고 만다! 그래야 롹커다!"
예전에는 분명 자신의 인생을 컨트롤하는 누군가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게 신이든, 악마든, 이계의 9급 공무원이든, 고남일은 그 존재의 악의에 괴롭힘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런 존재가 있을 리는 없다. 그러니까 운명 탓이 아니다. 미영에게는 고남일과 같은 일이 생기지 않는다. 그녀는 현명하니까. 모든 건 자신 탓이다. 렌즈를 충분히 안 챙겨온 건 예측하지 못한 자신이지 오래 전부터 있던 영국 법의 잘못이 아니다. 두꺼운 옷이 없는 건 그걸 준비하지 않은 자신이지 변덕 심한 영국 날씨 때문이 아니다. 옆구리는 가로등을 피하지 못해 다친 것이고 이빨이 깨진 건 겁도 없이 괴력의 덩치에게 덤볐기 때문이다. 감기 몸살이 낫지 않는 건 무리해서 녹음하면서 제대로 먹지도 않고 얇은 옷만 입고 다녔기 때문이다. 문제의 원인은 모두 자신에게 있었다. 거기서 뭔가 깨달음이 왔다. 더 이상 운명 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 난국을 기회로 자신의 덜 떨어진 버릇을 관두기로 했다. 무슨 문제든 자신을 바꾸면 해결된다는 결심을 했다.
'뭐가 됐든 나를 바꾸면 돼. 찌질하게 사니까 찌질해졌던 거야.'
고남일은 활기를 부여하기 위해 돈을 모으던 신발 박스를 활짝 열어젖혔다.
우선 주말에 세컨드 핸드 벼룩시장에 가서 <매트릭스>라는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 네오가 입은 것과 똑같은 외투를 샀다. 그걸 입으면 네오처럼 날아다닐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외투는 너무 따듯했다. 인생을 외투 없이 살아온 암흑기와 외투를 입고 살기 시작한 여명기로 구분하고 싶어질 정도로 고남일은 외투에 대해 감동했다.
그는 더 이상 궁상을 떨지 않기로 작심했다. 궁상은 또 다른 궁상을 불러오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절약이라는 개념과는 좀 헷갈렸다. 절약정신은 누가 뭐래도 좋은 것이고, 잘살게 만들 수 있는 기본 단위이자 긍정적 요인이다. 그러나 궁상을 떠는 건 그다지 좋지 않다. 궁상은 인생의 향방에 또 다른 궁상이라는 그림자를 불러들여 암울의 쳇바퀴를 만들고,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궁상과 절약은 분명 다른 것임에도 서로 구분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 건 UN이나 FIFA는 물론, 한국 대사관에서도 전혀 지침을 발표하지 않고 있었다. 고남일은 생각 끝에 쉽고 간단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미학이었다. 아름다운가, 아닌가로 따져보면 딱 구분되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돈을 몹시 아끼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이면 절약이고, 추잡함의 극단을 달리면 궁상이다.
고남일은 15번 버스를 기다리고 서서 세월을 죽이고 있을 시간에 지하철을 끊기로 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건 궁상맞다. 비자도 얼마 안 남은 놈이 버스 정류장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오지 않는 15번 버스를 똥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모습은 전혀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늘 반도 못 먹고 버리던 리듀스 코너의 이십 펜스짜리 싸구려 소시지를 육십 펜스짜리 맛있는 소시지로 바꾸었다. 아주 싸지만 못 먹을 정도인 걸 사느니 돈을 더 주고 다 먹을 수 있는 걸 사먹는 게 옳았다. 화장지도 똥구멍이 긁혀 쓰라리던 싸구려에서 부드럽고 비싼 걸로 바꿨다.
고남일은 자신이 추구했다가 도리어 자신을 압박해오는 그 지지리 궁상맞은 일들과 그렇게 싸워나가기로 했다. 비싸지만 지하철 타고 다니면 전혀 피곤하지도 않았다.
집에 오는 시간이 단축되자 녹음할 수 있는 시간도 늘었고, 작업 속도도 빨라진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바로 이거야. 수렁에서 헤어나는 방법은 수렁을 개무시하는 거였어."
고남일은 바싹 기운을 내며 열심히 배달하고 열심히 설거지 하고 열심히 로잔나에게 농담을 했다. 로잔나는 페스티발 이후로 서먹해졌다가 고남일의 그런 모습에 조금씩 누그러져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였고 런던 지하철이 고남일을 약 올리듯 덜컥 파업해버렸다. 비명과 울분이 절로 터져 나왔다.
"끄아아! 이게 뭐야! 또 버스 기다려야 돼?"
그랬다. 그는 또 하염없이 15번 버스를 기다려야 했다. 일을 마치고 정류장에서 울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서 있는 고남일의 어깨가 축 처졌다. 버텨내겠다는 오기와 근성이 겸연쩍어 하는 빛깔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오지 않는 버스에 대한 기다림이 지루함에서 분노로 바뀌려는 순간 그의 정신세계에서 어떤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시련을 겪으면서 꺄륵꺄륵 강해진 그의 롹정신에서 튀어나온 음악적 영감이었다. 동시에 어떤 멜로디가 뇌리를 기똥차게 때려와 고남일은 오선지 노트를 꺼내 마구 음표들을 그려나갔다. 그 음표들의 간격과 높낮이엔 뭔가를 이루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는 처절함이 구절구절 녹아나는 것 같았다. 그는 정류장 한구석에 앉아 그 안 오는 15번이 몇 대나 지나가버릴 때까지 아무 인식도 하지 못하고 곡을 써재꼈다.
곡을 완성했을 땐 깊은 밤이 되어 있었다. 그는 곡에 제목과 가사를 붙였다.
<15번 조낸 안 와(Bloody Fifteen Never Comes)>
아무리기다리고있어도아무리죽어라기다려도
15번진짜안와15번진짜안와
기다림이기만같고기가차고김빠지고
어딜가나어색하고어설프고어지러워
15번이버스인지빤스인지개뿔인지
뭐가됐든기다림은영원까지이어지네
무엇을기다리는건지실은나도정말모르겠네 QR코드
어디로가려했던건지기다리다지쳐까먹었어 (작가의
연주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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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이라도 하면 좋을 것 같군.'
고남일은 자신이 한국에 돌아가고 있다는 걸 인식했다. 이십사 시간 롹만 쾅쾅 틀어주는 방송이 있던 나라에서 그런 거 없는 나라로. 연인들이 있고 꿈이 있던 나라에서 카드 빚만 잔뜩 있는 나라로. 공항에 내리는 순간부터 아 씨발 아무 데도 갈 곳이 없는 나라로.
그렇지만 좀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더 이상 이방인 나부랭이가 아닌 나라로, 비자 따위를 받지 않아도 궁둥이를 걷어차이지 않는 모국으로, 암만 희한한 억양으로 지껄여도 웬만하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쓰는 나라로, 불멸의 '짜장면'과 '쏘주'가 새치름하게 존재하는 나라로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고남일이 할 수 있는 긍정은 겨우 그게 다였다.
주머니엔 달랑 사십 파운드뿐이었다. 환전해봤자 한국 돈 팔만 원 정도다. 도착해서 친구 이원식에게 연락하면 최소한 일주일은 재워줄 테지만,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큰소리를 뻥뻥 때려놓고 앞니가 부러진 채 추방당해서 돌아온 꼬라지를 보여주자니 꽤 쪽팔렸다. 인천공항에 피켓을 들고 마중 나와 있을 것 같은 막대한 카드 빚들도 덜컥 덜컥 두려웠다.
고남일은 미영이 건네준 엠피스리 플레이어를 만지작거렸다. 미영을 느낄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그걸 만지고 있자 미영이 너무 보고 싶어졌다. 자신을 안아주던 따스한 품이 너무 그리웠다.
고남일은 염불하듯 입술을 달싹거리며 '미영미영미영' 하고 웅얼거려보았다. 그녀를 떠올리며 런던에서의 추억을 반추하는 것만이 고통을 견딜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미영미영'거리고 있자 난데없이 성기가 팽창했고 동시에 용기라고 불러야 할 만한 감정도 벌떡 발기했다. 그 용기는 고남일의 가슴에 깃든 상심을 걷어내고 새로운 마음을 먹을 수 있게 만들었다.
'좋다고. 한국에서 다시 해보지 뭐. 충분히 강해졌어. 롹정신도 돌아왔잖아.'
그런 마음이 샘솟자 고남일의 눈빛에 빛나는 조명이 들어왔다. 그 조명은 영국에서 변환된 고남일의 카드들을 다시 꺼내 비추었다.
-강한 자신감.
-크아아 완전한 롹정신.
그것만 있으면 한국에서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유학파 배달원이라고 시급을 더 주진 않겠지만 숙식 제공되는 중국집에서 다시 오토바이를 타면 된다고 생각했다. 다시 돈을 모으고 다시 기타를 사고 다시 음악을 하면 된다고 자신했다.
그리고 다시 미영을 기다리면 된다.
고남일은 런던을 떠나기 전 내셔널 갤러리에서 루벤스의 <Samson and Delilah>를 다시 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 미영을 다시 만난, 기적적으로 우연이었던 순간과 그 그림은 연결되어 있었다. 그림은 아마도 그 자리에서 고남일이 다시 눈으로 볼 수 없는 순간들을 간직한 채 오랫동안 걸려 있을 것이다.
여하간 고남일은 한국에 돌아가 조낸 기다리기로 했다.
언젠가 다시 미영과 사랑할 수 있는 날을, 다시는 헤어지지 않을 수 있는 날을, 그 모든 것을 행복한 시간으로 뭉뚱그릴 수 있는 날을. 15번을 죽도록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날을. 시시한 날들을 완전히 넘어버릴 수 있는 날을. 궁극의 사랑이라는 초현실을.
그에게 영국 생활은 개떡 같았지만 행복한 순간이 훨씬 더 많았다. 인생은 결코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행복하진 않다. 그랬다간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행복은 짧다. 짧기 때문에 강렬한 존재인 것이다.
나머지 시간들은 그 행복의 기억을 곱씹거나, 다음 행복을 기대하며 사는 것이다.
"우리 비행기는 인천공항에 접근하고 있어요."
기장의 안내방송을 들으며 고남일은 창문 가리개를 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둠의 사막으로만 보이던 바깥에서 반짝반짝하는 공항의 불빛이 오아시스처럼 드러나기 시작했다. 불빛이 아련한 미학을 들이대자 고남일의 가슴속에 마지막으로 남은 회한이 떨쳐지며 뭉클해졌다. 그는 자신이 인생의 어떤 보이지 않는 단계를 넘었다고 느꼈다. 아무것도 걱정하고 싶지 않아졌다. 누가 뭐래도 음악만 만들고 싶었다. 새롭고 강력하고 아름다운 롹음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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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남일은 그럭저럭 유쾌하게 살던 사람이었다. 돈도 안 되고 유명하지도 않지만 자신이 만든 밴드에서 열심히 기타를 치고 있었으며 배달 아르바이트로 적당히 버는 생활비는 아쉬울 것 없었고, 사이좋은 애인도 있었고 아직 서른도 되지 않았다는 게 자랑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야말로 되는 일 없는 놈의 견본이 되기 딱 적절한 일들을 한꺼번에 몰아서 겪었다.
'되는 일이 없다'는 표현은 남들에겐 빈번하지 않은 비운의 확률이 자신에게만 집중적으로 발생할 때 쓰는 용어다. 주위의 모두가 연애를 하고 있는데 자신은 연애를 못 하고 있을 때, 아무도 치질에 걸리지 않았는데 자신만 똥구멍에 개떡 같은 게 생겼을 때, 하필이면 우산을 버스에 놓고 내린 순간 폭우가 와서 씨팔 쫄딱 젖을 때, 여유의 극한을 때릴 듯 한적한 도로에 차를 세우고 담배 한 갑을 사고 나왔는데 좆같은 주차위반 스티커가 붙어 있을 때, 급하거나 중요한 약속이 있는데 꼭 지하철이 고장 나고 지랄일 때, 사람들은 되는 일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그에게 전혀 일어나지 않던 일이었다. 그는 뭘 해도 잘 풀리고, 깔끔하고, 충분하고, 갈등이라곤 코딱지만큼도 없는 이십대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십대를 한 해 남긴 막판에 완전 갑자기 되는 일이 콧구멍만큼도 없어지는 날벼락을 맞게 될 줄은 몰랐다.
그는 콧물을 질질 흘리지 않고는 들어줄 수 없는 자신의 최근 일들을 대가리에 떠올렸다.
밴드 연습 뒤풀이로 간단히 술 한잔 마시고 집에 오다, 쩔쩔 매는 어떤 아줌마의 평행주차를 대신해주고 내려서 키를 돌려주는데 마침 지나가던 순찰차에 걸린 게 시작이었다. 입에서 술 냄새가 난다며 단속 장비를 불었는데 위반 수치인 혈중알코올농도 0.05퍼센트를 살짝 오버한 0.051퍼센트가 나왔다. 남을 도우려다 그런 건데도 경찰은 봐주는 법이 없었다. 억울하지만 법을 어긴 거니까 고남일은 깔끔하게 웃어넘겼다. 그런데 약속 장소에 뛰어가다 주차되어 있는 어떤 승용차와 골반뼈가 살짝 부닥쳤는데 사이드미러가 깨져버렸고, 그게 마침 죽도록 비싼 외제차였던 건 웃어넘길 수 없었다. 수리비가 어찌나 비싼지 돈을 탈탈 털어서 물어주느라 똥구멍이 찢어질 뻔했다. 조심하지 않은 자신 탓이라고 생각하고 그는 주의하며 살기로 했다. 그러나 아까운 생돈이 날아간 걸 잊으려고 술 마시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 앉은 모르는 여자가 어떤 남자에게 마구 따귀를 맞기 시작했다. 그는 '여자를 때리는 놈이 다 있어!' 하면서 남자를 제압하고 여자를 구해줬다. 여자를 달래서 택시를 태워 보낸 걸 나름 선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여자는 하필이면 상태가 많이 그릇된 애였고, 다짜고자 찰떡 진공 스토킹을 시작하는 재앙을 부렸다. 어떻게 알았는지 그 넋 나간 여자는 고남일의 밴드가 클럽에서 공연하는 날마다 찾아와서 행패를 부렸고, 휴대폰 번호까지 알아내 계속해서 전화를 하고, 심지어 자기 애를 책임지라고 소리치면서 연습 중인 합주실에 뛰어들곤 했다. 남자에게 맞고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거였는지도 모른다. 맹세코 고남일은 그 여자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걸 오해한 그의 애인이자 밴드의 베이시스트 여자애는 이렇게 말하고 밴드에서 나가버렸다.
"끝이야. 요런 쓰레기 같은 놈."
사랑하는 애인은 그 뒤로 완전히 연락을 끊었다. 실연의 실의에 빠진 고남일이 합주실에 안 나가니까 다른 멤버들이 투덜거리며 딴 밴드로 가버려 고남일의 밴드는 쓰다 버린 반창고처럼 되어버렸다. 그쯤 되자 고남일은 깔끔하게 웃어넘기기엔 뭔가 몹시 개떡 같은 일들이 자신에게 벌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눈치 까게 되었다. 유쾌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는 우울한 막장에 닿을 일이 없다는 철학을 십년째 이어오던 그였지만 그때부턴 삶이 하도 바닥에 질질 끌려 처절하기만 했고 하루 종일 궁상맞은 태도로 살아야 해서 유쾌고 나발이고 암울한 캐릭터가 되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고남일이 일하던 중국집이 미성년자 단속에 걸려 영업정지를 때려 맞았다. 손님이 소주를 달라고 해서 줬고 도저히 미성년자로 보이지 않는 녀석들이었는데 믿기지가 않았다. 무슨 중국집에 미성년자 단속을 나오는 거냐고 화낼 틈도 없었다. 가게 사장이 나타나 도대체 왜 나를 엿 먹이는 거냐며 그의 머리를 개 때리듯 때렸고, 그는 남은 월급도 한 푼 못 받고 쫓겨났다. 고남일은 그때부터 겉늙어 보이는 놈들을 증오하기 시작했는데 음주운전으로 부과된 벌금이 때마침 청구되었고 낼 돈이 없어 노역으로 때웠더니 피부가 흙에서 막 파낸 감자처럼 겉늙어 보이게 되었다.
너무나 짧은 기간에 그런 액운이 소나기처럼 퍼붓자, 그는 유쾌한 성격과 유머감각의 대부분을 상실했다.
응원하는 야구팀은 14연패에 빠지며 단독 꼴찌로 떨어졌고, 그가 지지하던 청렴한 정치인이 검은돈을 받았다는 악랄한 누명을 쓰고 선거에서 참패했다.
그는 인간이라면 이 타이밍에 조금 격하게 좌절해줄까 싶었다. 하지만 비운에 쫄면 비운이 자신을 만만하게 보고 줄기차게 괴롭힐 것 같아 남은 유쾌함을 주섬주섬 끌어모아 다시 시작해보기로 했다.
'운 따위는 신경 끄면 존재감도 없는 거야. 몸 안 아픈 게 어디냔 말이지.'
기가 막히게도 그러자 갑자기 낡은 중고차처럼 몸 여기저기가 고장 나기 시작했다. 충치에 치질에 위염에 결막염에 아오 시바 편두통까지 줄줄이 소시지처럼 꼬리를 물고 찾아왔다. 그는 몸의 수리비를 위해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해야 했다. 되는 일도 없는 몸에 빚낸 돈을 처바르고 있는 자신이 너무 싫었다.
마지막 재앙은 집중호우가 내리던 어느 밤 액운에 지쳐 잠들었다가 입은 수해였다. 그건 싹쓸이 결정타였다. 고남일은 완전히 꼭지가 돌아버릴 지경이 되었다.
'저지대 지하 방도 아니고 노량진 산꼭대기에 살고 있는데 수해라니 말이 되냐.'
그건 집중호우로 옥상에 저수조처럼 고인 물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딱 고남일 방 천장 쪽으로 무너지면서 벌어진 재난이었다. 그는 침대에 누워 자다 그 물을 고스란히 얼굴에 처맞았다. 그는 쏟아지는 물세례에 '끄아아 시빠빠'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지만 대체 어떤 황당한 액운이 더 이어질지 몰라 몹시 두려워졌다. 그는 못 쓰게 된 침대를 쓸쓸히 내다 버리며 심한 우울을 앓게 되었다. 그의 연인과 뼈와 살이 분리되고 영혼이 녹아내리는 사랑을 나누던 추억의 침대였다.
그리고 빌어먹을 서른 살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두려웠고, 아주 궁상맞은 표정을 지으며 살아야 하는 남자가 되었다.
그에게 남은 건 보증금 백만 원짜리 너절한 자취방과 목숨처럼 아껴온 일렉트릭기타, 그리고 주행거리계가 고장 난 낡은 오토바이 한 대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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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보기에 한국 사회란 멋있게 살고 있는 놈을 만날 확률이 높지 않아서 어지간히 멋대가리가 없는 곳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멋지게 해내는 것보단 그걸 꾹 참고 견디면서 당장 눈앞의 생존을 추구하는 게 철든 인간의 바람직한 태도라고 생각하는 듯한 꼬질꼬질한 놈들로 꽉 차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무슨 절대적인 철학이라도 되는 듯 부여잡고 '어떻게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사니?'하며 흐린 눈빛을 전파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만나는 건 지겨운 일이었다.
기타는 그렇지 않았다. 기타는 언제나 '꿈꾸세요~ 꺄륵꺄륵' 하는 소리를 냈다. 고남일은 그래서 기타를 밥보다 좋아했다. 사춘기 때 롹음악을 만난 뒤부터였다. 전설적인 롹밴드들이 가진 위대한 롹정신의 작살나는 파워에 경도되는 순간, 그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임을 깨달았다. 그런데 학업을 포기하고 롹밴드질을 하겠다고 선언하자 그의 집은 미친개가 뜯어놓은 베개처럼 되었다. 어째서 중산층의 평범한 가정에서 너 같은 '돌연변이'가 발생한 거냐고, 그의 부모님은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해 펄쩍펄쩍 뛰었다. 하지만 그는 부모님의 중산층 계급을 유지하는 일엔 관심이 없었다. 그가 생각한 계급은 기타 실력의 레벨이었고 신경은 오로지 꿈꾸는 소리를 내는 기타에 쏠려 있었다.
그것은 기타 소리의 풍부한 울림 때문이었다. 기타의 음색이 끼쳐대는 진동이 고남일의 가슴에 지각변동을 일으켜버린 것이다. 세상 모든 아름답고 신기한 것들을 코앞에 들이대도 기타만큼 그를 매료시킬 수 있는 건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고남일은 생각했다.
매료란 참 멋진 말이다. 제발, 의학이라면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일에 매료된 자들이 하고, 정치라면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일념에 매료된 자들이 하고, 군인이라면 싸워서 이기고 나라를 지키는 일에 완전히 매료된 자들이 해야만 하는 것이다. 공무원은 공공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꿈에 부풀어 오른 자가 하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미칠 것 같은 놈이 검사를 하든 경찰을 하든 해야 한다. 그런 일뿐만 아니라 도어맨이든, 택시 운전이든, 똥 푸는 일이든, 뭐가 됐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야 인생에 매료되는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집에선 기타를 못 치게 하니까 고남일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독립했고, 자유로운 영혼과 인간의 예술적 존엄을 기타로 표현하는 짓에 신명을 다 바칠 태세였다.
하지만 가장 먼저 자신을 가로막은 건 '먹고사는 문제'라는 못생긴 괴물이었다. 그놈은 모질고 징하고 까다롭고 형편없는 녀석이었다. '이거나 먹지 애송이!' 하면서 놈이 휘두르는 '의식주 권법'에 코를 얻어맞아보자 사람들이 왜 이 녀석에게 험한 꼴을 당하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살아가는 건지 대번에 눈치 깠다. 당장 방값을 내야 했고, 밥값과 술값이 있어야 했고, 옷을 사 걸쳐야 했다. 그는 우선 그놈을 제압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놈과 싸우는 동안 고남일의 강렬했던 롹정신은 서서히 희석되어갔다. 정확히 말하면 롹정신 때문에 늘 반항하는 캐릭터로 살다보니 계속 잘리거나 때려치워야 해서 밥 먹고 살기 힘들어서 자신도 모르게 현실과 타협해갔던 것이었다.
민박집 식탁에 앉은 고남일은 기타만 잡으면 불뚝 솟아오르던 짜릿하고 강렬했던 롹정신이 지금은 너무 약하게 감지된다는 걸 느꼈다. 그는 라면 국물을 쓰디쓰게 마셨다.
그렇지만 살면서 기타를 놓으려고 한 적은 없었다. 군대에서도 '고참'이 되었을 때 내무반에 기타를 갖고 들어가 손가락이 녹슬지 않게 연습해뒀다. 롹정신을 대변하는 게 긴 머리칼이라고 믿는 고남일의 스타일을 상관하지 않는 아르바이트만 전전했고, 가장 최근엔 월급 구십만 원짜리 술집 매니저로 일하고 살았다. 롹정신과 '먹고사는 문제'는 함께 섞일 수 없는 원수 같았다. 그래서 둘 다 잘되지 않았다. 먹고살았지만 잘 먹고살진 않았다. 결국은 롹정신 때문에 평범한 일도 못하고, 미래가 없는 일들만 하면서 살고, 여자들도 그의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폭풍처럼 떠나갔지만 정작 '롹정신'은 살아남기 위한 타협을 하는 동안 희석되어간 것이다. 집에 돈이 많은 놈이 아니고서야 추구할 수 있는 정신이 아닌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의 정신에 '뽕'을 놓아주며 빌어먹을 거지 같은 삶이란 걸 지탱하게 해준 것 또한 롹정신인 것 같았다.
그 순간이었다. 고남일은 자신의 가슴을 뜨겁게 해주던 '뽕기'가 자신을 다시 휘감아오는 걸 느꼈다. 런던의 칙칙한 민박집에서 라면을 빨다가 느끼다니 겸연쩍었지만 그 기운은 몹시 반가운 것이었다.
'안녕 친구. 오랜만이다.'
롹정신이 가슴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며 고남일의 뇌리에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 롹정신! 내가 너를 깜빡하고 살았어!"
그 단어를 다시 발음해보자 갑자기 가슴속에서 지잉~ 하는 디스토션 이펙터의 육중한 사운드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아주 미약한 진동이었지만 고남일은 이 멋진 새끼, 하는 벅찬 가슴으로 라면 냄비의 밑바닥까지 핥아 먹은 다음 힘차게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지금껏 가진 게 아무것도 없으면서 롹정신까지 잃었으니 등신 되기 딱 좋았던 거라는 깨달음이 어깨에 척 걸쳐졌다.
라면 냄비를 씻는 고남일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떠나면 돼!' 하고 한국이라는 경계선을 넘어 떠났다. 그리고 진짜 와버렸다. 고남일은 매끈해진 냄비를 노려보았다. 정신이 맑았다.
'이제 롹정신을 부활시키면 돼.'
그 강렬했던 폭발력을 되찾는다면 삶과 죽음과 비운까지도 맘껏 조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멋지게 살고, 안 되면 죽든지, 하면서 그는 가슴에 남은 롹정신을 매만졌다. 그것은 조만간 다시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돌아올 것만 같았다.
중략
로잔나는 영국도 싫고 고남일도 바보 같다며 마구 술만 마셔댔다.
한마디로 한국을 떠나올 때와 비슷한 총체적 난국이었다.
"지겨워 죽겠군. 아무리 몸부림쳐도 역시 벗어날 수 없는 팔자인 건가."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그러나 대책 같은 건 떠오르지 않앗다. 고남일은 한국에서처럼 절망하거나 버럭 진절머리를 내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러기도 지겨웠다. 한국에선 안 되면 떠나기라도 했다. 영국에서도 안 되면 떠나야 하는 건가. 아예 평생 떠나기만 하고 살 거냐. 생각해보니 정면으로 돌파하지 않고 도피하려는 성향이 자신의 롹정신에 위배되는 불경한 마인드로 보였다.
고남일의 가슴속에서 오기와 근성이 치밀어 올랐다.
"내가 씨발 버티고 만다! 그래야 롹커다!"
예전에는 분명 자신의 인생을 컨트롤하는 누군가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게 신이든, 악마든, 이계의 9급 공무원이든, 고남일은 그 존재의 악의에 괴롭힘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런 존재가 있을 리는 없다. 그러니까 운명 탓이 아니다. 미영에게는 고남일과 같은 일이 생기지 않는다. 그녀는 현명하니까. 모든 건 자신 탓이다. 렌즈를 충분히 안 챙겨온 건 예측하지 못한 자신이지 오래 전부터 있던 영국 법의 잘못이 아니다. 두꺼운 옷이 없는 건 그걸 준비하지 않은 자신이지 변덕 심한 영국 날씨 때문이 아니다. 옆구리는 가로등을 피하지 못해 다친 것이고 이빨이 깨진 건 겁도 없이 괴력의 덩치에게 덤볐기 때문이다. 감기 몸살이 낫지 않는 건 무리해서 녹음하면서 제대로 먹지도 않고 얇은 옷만 입고 다녔기 때문이다. 문제의 원인은 모두 자신에게 있었다. 거기서 뭔가 깨달음이 왔다. 더 이상 운명 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 난국을 기회로 자신의 덜 떨어진 버릇을 관두기로 했다. 무슨 문제든 자신을 바꾸면 해결된다는 결심을 했다.
'뭐가 됐든 나를 바꾸면 돼. 찌질하게 사니까 찌질해졌던 거야.'
고남일은 활기를 부여하기 위해 돈을 모으던 신발 박스를 활짝 열어젖혔다.
우선 주말에 세컨드 핸드 벼룩시장에 가서 <매트릭스>라는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 네오가 입은 것과 똑같은 외투를 샀다. 그걸 입으면 네오처럼 날아다닐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외투는 너무 따듯했다. 인생을 외투 없이 살아온 암흑기와 외투를 입고 살기 시작한 여명기로 구분하고 싶어질 정도로 고남일은 외투에 대해 감동했다.
그는 더 이상 궁상을 떨지 않기로 작심했다. 궁상은 또 다른 궁상을 불러오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절약이라는 개념과는 좀 헷갈렸다. 절약정신은 누가 뭐래도 좋은 것이고, 잘살게 만들 수 있는 기본 단위이자 긍정적 요인이다. 그러나 궁상을 떠는 건 그다지 좋지 않다. 궁상은 인생의 향방에 또 다른 궁상이라는 그림자를 불러들여 암울의 쳇바퀴를 만들고,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궁상과 절약은 분명 다른 것임에도 서로 구분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 건 UN이나 FIFA는 물론, 한국 대사관에서도 전혀 지침을 발표하지 않고 있었다. 고남일은 생각 끝에 쉽고 간단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미학이었다. 아름다운가, 아닌가로 따져보면 딱 구분되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돈을 몹시 아끼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이면 절약이고, 추잡함의 극단을 달리면 궁상이다.
고남일은 15번 버스를 기다리고 서서 세월을 죽이고 있을 시간에 지하철을 끊기로 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건 궁상맞다. 비자도 얼마 안 남은 놈이 버스 정류장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오지 않는 15번 버스를 똥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모습은 전혀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늘 반도 못 먹고 버리던 리듀스 코너의 이십 펜스짜리 싸구려 소시지를 육십 펜스짜리 맛있는 소시지로 바꾸었다. 아주 싸지만 못 먹을 정도인 걸 사느니 돈을 더 주고 다 먹을 수 있는 걸 사먹는 게 옳았다. 화장지도 똥구멍이 긁혀 쓰라리던 싸구려에서 부드럽고 비싼 걸로 바꿨다.
고남일은 자신이 추구했다가 도리어 자신을 압박해오는 그 지지리 궁상맞은 일들과 그렇게 싸워나가기로 했다. 비싸지만 지하철 타고 다니면 전혀 피곤하지도 않았다.
집에 오는 시간이 단축되자 녹음할 수 있는 시간도 늘었고, 작업 속도도 빨라진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바로 이거야. 수렁에서 헤어나는 방법은 수렁을 개무시하는 거였어."
고남일은 바싹 기운을 내며 열심히 배달하고 열심히 설거지 하고 열심히 로잔나에게 농담을 했다. 로잔나는 페스티발 이후로 서먹해졌다가 고남일의 그런 모습에 조금씩 누그러져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였고 런던 지하철이 고남일을 약 올리듯 덜컥 파업해버렸다. 비명과 울분이 절로 터져 나왔다.
"끄아아! 이게 뭐야! 또 버스 기다려야 돼?"
그랬다. 그는 또 하염없이 15번 버스를 기다려야 했다. 일을 마치고 정류장에서 울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서 있는 고남일의 어깨가 축 처졌다. 버텨내겠다는 오기와 근성이 겸연쩍어 하는 빛깔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오지 않는 버스에 대한 기다림이 지루함에서 분노로 바뀌려는 순간 그의 정신세계에서 어떤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시련을 겪으면서 꺄륵꺄륵 강해진 그의 롹정신에서 튀어나온 음악적 영감이었다. 동시에 어떤 멜로디가 뇌리를 기똥차게 때려와 고남일은 오선지 노트를 꺼내 마구 음표들을 그려나갔다. 그 음표들의 간격과 높낮이엔 뭔가를 이루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는 처절함이 구절구절 녹아나는 것 같았다. 그는 정류장 한구석에 앉아 그 안 오는 15번이 몇 대나 지나가버릴 때까지 아무 인식도 하지 못하고 곡을 써재꼈다.
곡을 완성했을 땐 깊은 밤이 되어 있었다. 그는 곡에 제목과 가사를 붙였다.
<15번 조낸 안 와(Bloody Fifteen Never Comes)>
아무리기다리고있어도아무리죽어라기다려도
15번진짜안와15번진짜안와
기다림이기만같고기가차고김빠지고
어딜가나어색하고어설프고어지러워
15번이버스인지빤스인지개뿔인지
뭐가됐든기다림은영원까지이어지네
무엇을기다리는건지실은나도정말모르겠네 QR코드
어디로가려했던건지기다리다지쳐까먹었어 (작가의
연주영상)
중략
'추락이라도 하면 좋을 것 같군.'
고남일은 자신이 한국에 돌아가고 있다는 걸 인식했다. 이십사 시간 롹만 쾅쾅 틀어주는 방송이 있던 나라에서 그런 거 없는 나라로. 연인들이 있고 꿈이 있던 나라에서 카드 빚만 잔뜩 있는 나라로. 공항에 내리는 순간부터 아 씨발 아무 데도 갈 곳이 없는 나라로.
그렇지만 좀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더 이상 이방인 나부랭이가 아닌 나라로, 비자 따위를 받지 않아도 궁둥이를 걷어차이지 않는 모국으로, 암만 희한한 억양으로 지껄여도 웬만하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쓰는 나라로, 불멸의 '짜장면'과 '쏘주'가 새치름하게 존재하는 나라로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고남일이 할 수 있는 긍정은 겨우 그게 다였다.
주머니엔 달랑 사십 파운드뿐이었다. 환전해봤자 한국 돈 팔만 원 정도다. 도착해서 친구 이원식에게 연락하면 최소한 일주일은 재워줄 테지만,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큰소리를 뻥뻥 때려놓고 앞니가 부러진 채 추방당해서 돌아온 꼬라지를 보여주자니 꽤 쪽팔렸다. 인천공항에 피켓을 들고 마중 나와 있을 것 같은 막대한 카드 빚들도 덜컥 덜컥 두려웠다.
고남일은 미영이 건네준 엠피스리 플레이어를 만지작거렸다. 미영을 느낄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그걸 만지고 있자 미영이 너무 보고 싶어졌다. 자신을 안아주던 따스한 품이 너무 그리웠다.
고남일은 염불하듯 입술을 달싹거리며 '미영미영미영' 하고 웅얼거려보았다. 그녀를 떠올리며 런던에서의 추억을 반추하는 것만이 고통을 견딜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미영미영'거리고 있자 난데없이 성기가 팽창했고 동시에 용기라고 불러야 할 만한 감정도 벌떡 발기했다. 그 용기는 고남일의 가슴에 깃든 상심을 걷어내고 새로운 마음을 먹을 수 있게 만들었다.
'좋다고. 한국에서 다시 해보지 뭐. 충분히 강해졌어. 롹정신도 돌아왔잖아.'
그런 마음이 샘솟자 고남일의 눈빛에 빛나는 조명이 들어왔다. 그 조명은 영국에서 변환된 고남일의 카드들을 다시 꺼내 비추었다.
-강한 자신감.
-크아아 완전한 롹정신.
그것만 있으면 한국에서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유학파 배달원이라고 시급을 더 주진 않겠지만 숙식 제공되는 중국집에서 다시 오토바이를 타면 된다고 생각했다. 다시 돈을 모으고 다시 기타를 사고 다시 음악을 하면 된다고 자신했다.
그리고 다시 미영을 기다리면 된다.
고남일은 런던을 떠나기 전 내셔널 갤러리에서 루벤스의 <Samson and Delilah>를 다시 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 미영을 다시 만난, 기적적으로 우연이었던 순간과 그 그림은 연결되어 있었다. 그림은 아마도 그 자리에서 고남일이 다시 눈으로 볼 수 없는 순간들을 간직한 채 오랫동안 걸려 있을 것이다.
여하간 고남일은 한국에 돌아가 조낸 기다리기로 했다.
언젠가 다시 미영과 사랑할 수 있는 날을, 다시는 헤어지지 않을 수 있는 날을, 그 모든 것을 행복한 시간으로 뭉뚱그릴 수 있는 날을. 15번을 죽도록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날을. 시시한 날들을 완전히 넘어버릴 수 있는 날을. 궁극의 사랑이라는 초현실을.
그에게 영국 생활은 개떡 같았지만 행복한 순간이 훨씬 더 많았다. 인생은 결코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행복하진 않다. 그랬다간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행복은 짧다. 짧기 때문에 강렬한 존재인 것이다.
나머지 시간들은 그 행복의 기억을 곱씹거나, 다음 행복을 기대하며 사는 것이다.
"우리 비행기는 인천공항에 접근하고 있어요."
기장의 안내방송을 들으며 고남일은 창문 가리개를 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둠의 사막으로만 보이던 바깥에서 반짝반짝하는 공항의 불빛이 오아시스처럼 드러나기 시작했다. 불빛이 아련한 미학을 들이대자 고남일의 가슴속에 마지막으로 남은 회한이 떨쳐지며 뭉클해졌다. 그는 자신이 인생의 어떤 보이지 않는 단계를 넘었다고 느꼈다. 아무것도 걱정하고 싶지 않아졌다. 누가 뭐래도 음악만 만들고 싶었다. 새롭고 강력하고 아름다운 롹음악을.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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