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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어제

by 가라 2011. 2. 5.

아침엔 이상한 꿈을 꾸다 깼다. 얼굴도 모르는 후임이 전화가 와서 스케줄이 바뀌었으니 복귀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누가 스케줄을 바꾼 거냐고 물었고, 외박계도 작성했고 지금 심지어 대군데 어떻게 삼십 분만에 가겠냐고 따졌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전역을 한 사실을 알게 되었고 스케줄을 바꾼 털자 병장을 곯려주기 위해 전화를 걸 생각을 했다. 그동안 받은 설움을 다 날려버리기 위해 쏟아낼 말을 준비한 후 핸드폰으로 번호를 찾았는데 그 순간 잠이 깼다. 분했다

오후엔 가족끼리 영화관을 갔다. 본리동 감삼동에 살던 어린 시절의 터전을 벗어나 내 타향살이가 시작된 10년 전부터 우리 집은 고속도로와 바로 붙어있는 장기동의 신축 아파트로 이사를 왔었다. 유년 시절의 기억은 아파트라곤 5층짜리 주공 아파트 단지만 즐비했고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 사이로 낮은 주택들이 들어차있던, 구석엔 개천이 더럽게 흐르던 대구직할시의 최외곽지역, 나보다 몇 살 위의 개구리소년을 찾는 전단지가 나뒹굴던 낡은 본리동 감삼동의 다운타운이었다. 개구리소년들이 개구리를 찾던 그 와룡산 인근엔 아파트로 가득 차고 지하철이 뚫린지 오래고, 이곳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동생들의 추억은 이 땅을 너무나 낯설게 밟고 있는 나와는 다르다

밤에 집 앞 먹자골목에서 창원이를 보고 헤어지는데, 이제 다른 지방으로 떠나고 나면 지금껏 연락하고 만나는 친구 중에 제일 오래된 친구(연락닿는 더 오래된 친구도 있긴 하지만 보진 않으니)를 보기가 어렵겠구나 싶어 기분이 묘했다. 이제 대구에 와도 만날 사람 하나 없겠다. 어딘지 기분이 이상해 집으로 가기 전에 좀 걸었다. 두 블럭만 걸으면 어린 시절 다니던 초등학교가 나온다. 고등학교 때 이후로 모처럼 집에 올 때마다 새 건물이 들어서던 이 동네는 개발 초기였던 내 유년과는 비교할 수도 없게 바뀌었다. 그나마 학교가 가까워지면서 어릴 때 기억이 나게 하는 건물들이 보였다. 옛날 그대로인 집은 거의 없다. 학교 앞 문구점도 한 군데를 빼면 문을 닫거나 상호를 바꾸어 운영 중이다. 고등학생 땐지 대학 신입생 땐지 한 번 와봤을 때하고도 또 다르게 바뀌었다. 종종 컵라면을 사먹던 LG25시가 GS25로 바뀐지는 오래되었으나, 길 건너 성당주공단지가 있던 본리동이 재개발되면서 예전 건물에 그대로 남아있는 상점은 정말이지 하나도 없었다

성당주공아파트의 재개발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본리동, 감삼동, 성당동에 걸쳐 있던 3단지 아파트 단지 그 거대한 부지가 완전히 어린 시절의 기억과는 다르게 바뀌어 있었다. 5층짜리 아파트만 있었기 때문에 단지 내에 길이라 부를 곳도 참 많았고 놀이터도 군데군데 있었다. 벤치 수는 말할 것도 없고 나무도 많이 심어 놓았기에 어린 시절에는 숲처럼 느껴지는 곳이 무한정 있었다. 그 중에도 상가 맞은 편 아파트 길의 벚꽃 길은 봄이면 너무 아름다워서 일부러 하교 길에 돌아가기도 했다. 동생과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숨은 길과 숲을 찾고 야구나 축구를 하러 공터를 찾아다니던 기억이 생생한데 그 굽은 길들과 작은 언덕들 숲이건 놀이터도 자취를 찾을 수 없다. 멋진 래미안이 들어선 그 땅이 너무나 낯설다. 여기를 돌면 벤치가 나올 것 같고, 저기쯤에 숨겨진 운치있는 자전거길이 있었는데, 길 잃은 사람처럼 어안이 벙벙했다. 단지 내에는 차도에도 블록을 깔아 놓고, 아파트 층수도 높아 건물 간 간격이 넓어 길이라 부를 곳도 없고 구조는 단순해져 있었다. 정말 멋진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갑자기 숨바꼭질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땅따먹기 팽이치기를 하던 그 공간이 자취도 없이 다 사라져버린 것이다. 서점, 문방구, 피아노 학원, 미술 학원, 태권도장, 중국집이 있던 그 곳에도 다 전혀 관계없는 다른 상점이 들어찬 채였다. 아파트 뒤의 공원이 생기기 전에는 그 밑에 더러운 하천도 흘렀다. 이곳은 완전히 낙후된 곳이었다. 점점 복개 공사를 하고 도로가 생기고 아파트와 상점들이 들이차기 시작했지만 그곳에 공원이 들어서던 그맘 때도 다 기억이 나는데 이제는 멋들어진 아파트에 딸린 멋진 공원으로 당연하게 거듭나 있다. 이곳을 사는 아이들의 기억은 내 기억과는 완전히 다르겠구나. 그맘 때 미술 학원이나 피아노 학원 선생님들이 지금 내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땅은 여전한데 그 때 그 사람들, 친구들 중 여기 그대로 남아 있는 사람은 찾기가 힘들 것이다. 우연히라도 누군갈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세대가 이렇게 바뀌어 가겠구나. 이제 세상에 나온 아이들은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생각들을 하게 되겠구나. 싶은 알 수 없는 철듦의 시간을 걸었다. 지금 사는 아파트도 최신 아파트였던지 십년이 넘었구나, 내가 살고 있는 곳이 대도시란 생각을 완전히 잊고 살고 있었다. 이 동네가 촌동네였던 게 아니라 내가 살던 때가 옛날이 되어가는 것이었다. 걷다보니 다시 모교인 본리초등학교의 뒷문으로 흘러들어오게 돼 안을 들여다 보았다. 옛날에 있던 사육장은 없어지고, 섭씨 40도를 관측했던 백엽상도 위치를 옮겼다. 본관과 별관의 2, 3, 4층을 이어놓아 옛날에 주먹 야구를 하던 그 빈 공간은 사라졌다. 후문에 낡은 문구점만은 옛날 그대로였다. 정말 이상했다

이제 나는 그 맘 때의 젊은 부모들의 나이에 가까워진다. 그때 그들은 무슨 생각들이었을까. 무얼 꿈꾸었고 무엇을 그리 궁리했을까

세시봉 콘서트를 보다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이상하게도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환상을 지운다. 독재에 항거하며 거리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있는 중에 팝송을 부르며 멋있게 기타를 치는 사람들이 있었고, 힘들게 살면서 내 자식만은 더 편하게 살길 바라던 부모와 그 기대에 부응하거나 반하면서 자라나는 자식들이 살아가며 일구어 온 땅. 이집트의 시위를 보다 보면 내가 알지 못했던 역사가 떠오르고, 3년 전 서울 땅의 집회 현장에서 느낀 기묘한 절망감도 떠오른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나 토지가 있고 태백산맥이 있다.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나는 왜 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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