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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한파

by 가라 2011. 1. 17.


 그야말로 한파의 기습이었다
 토요일 밤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는 시간에 보일러가 맛이 갔다는 것을 알았지만 늦은 밤이었다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밤까지만 해도 잘 나오던 온수는 아예 냉수도 공급하지 않았다
 옷을 껴입고 일단 잤으나 아침이 되어도 사정은 당연히 나아지질 않았고
 파주 워리어베이스를 연상케 하는 추위에 바로 옆 보일러실로 나가면서도 옷을 껴입어야 했다
 바람은 시원하게 들어왔고, 손에 쥔 드라이기는 선을 녹이는 데 쓰였기 때문에 몸을 녹이진 못했다
 드라이기과 과열로 멈출 때마다 방으로 돌아와서 휴식을 취했으나 방의 온도는 점점 내려갔다
 난방 공급선을 녹일만큼 녹였다 싶을 때 연통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왔고
 이미 오전에 다른 집 보일러를 종일 고쳤던 주인 아주머니도 퇴각하고 나도 퇴각했다
 그러나 밥을 먹는 동안 보니 아무 것도 나아지질 않았고, 태평하게 책이나 읽고 있다간 금세 해가 기울 게 뻔했다
(보일러실에는 불도 안 들어온다)
 실내난방은 그래도 고쳐졌을지 모른단 희망을 안고 온수 공급선을 찾아보니 아까는 못 봤던 선의 중간 중간에 얼음덩어리가 맺혀있다
 방으로 퇴각했다 보일러실로 출정했다 하기를 몇 회, 마침내 연기는 신나게 활활 뿜어져 나왔고, 수도꼭지에는 온수가 콸콸 흘러넘쳤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아무리 방에서 뒹굴거려도 실내온도는 오르지 않고 DMB로 TV나 보다간 얼어죽기 딱이었다
 수도꼭지에서 온수가 한 방울씩만 나오게 해놓고 제3차 보일러실 출정에 나섰다
 칼날 같은 바람을 맞으며 긴 시간을 보낸 끝에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고, 밤은 곧 닥칠 기세였다
 지나가던 주인 아주머니와 교대하고 주인 집에서 받아온 전기 히터를 틀어 몸을 녹였다
 하루종일 이상하게도 고3 되기 전 겨울방학 때 보충수업 받던 기숙사가 떠올랐다
 마침내 아주머니도 포기했고, 도리없이 저녁을 먹었다
 그런데 설거지를 할 즈음에
 방바닥 어딘가에서부터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작은 온기!
 살았다!
 오 살았다!

 집에 온기 하나 없는 동안 일대를 서성이던 바퀴벌레는 다 죽었을 것이다. 숙면할 수 있었다

 뜨끈뜨끈한 방에서 이제야 8월에 선물받은 "정의란 무엇인가"를 다 읽었다. 이런저런 철학들에 동감하고 의심하기를 여러 차례, 마지막에 짧게 등장한 견해에는 당황스럽게도 며칠 전에 떠들던 서사적 존재라는 언급이 있었다
 우리는 서사의 어느 부분에 있는가?
 골때리는 일이다. 나는 어디쯤 있는가
 아무 것도 모른다
 뭔가를 하기 전에는
 당연히 아무 것도 모른다

 해서 오늘은 다시 몸을 움직였다. 어제에 비하면 봄 날씨였다
 선생님은 오늘도 안 계시고 연출하려던 극을 다시 보니 영 자기 연민에 빠져가는 느낌만 강한 극이라 고민만 늘었다
 하지만 곧 위염은 나을 것이고
 올해엔 과연 뭔가를 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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