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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눈 내린 대구

by 가라 2010. 12. 27.

 원래 눈이 안 오는 지방인데다 집에 잠깐씩 있다 가기 때문에 대구에서 눈을 볼 일이 없었는데, 용케 친구들과의 약속 시간에 맞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고향 땅에선 익숙지 않은 풍경. 창원이는 삼성으로 정환이도 성남으로 취직이 됐다. 명절 때가 아니면 이제 집에 와도 볼 사람이 없게 됐다. 나의 앞길은 여전히 멀고도 험하기만 하다. 그런데도 눈이 와서 그런가, 친구들의 취직 소식이 기뻐서 그런가, 마음은 풀어지고 술 없이도 취하다가, 눈이 그치고 겨울이 가면 뜨겁게 새 인생이 시작될 것 같은 느낌, 인생의 어느 시기도 끝이 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올해는 나에게 참 지독했다. 연초부터 군 생활은 위기를 맞았고, 중간 계급으로서의 갑갑했던 마무리, 믿었던 사람의 배신 등으로 극악의 여름으로 치달았는데, 전역 후에는 불면증과 위염으로 이어진 레이스에 심신의 힘이 다 소진되었다. 학교는 나의 과거 행적을 기억해줄 리 없고, 잘 풀리지 않는 하루 하루 속에 자신감도 몸무게도 바닥을 치던 생활은 끝날 줄을 모르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라는 어설픈 기대만을 남기게 했던 일 년

 똥은
 썩는 정도를 넘어서면
 거름이 된다

 똥 같던 한 해, 썩어가던 몸, 나의 이십대 중반은 그렇게 끝이 난다. 이미 앞서 갈 사람들은 앞서갔고, 나는 조금 다른 결승점을 겨냥하며 몸을 풀고 있다. 조급할 것 없다. 지금의 절망이 앞으로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세상은 변치 않고, 나는 누구에게도 기억될 필요없다. 다만 나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있어야 한다. 몸은 미친 듯이 움직였지만 마음은 정체되어 있던 것을 반성한다. 한 해, 아니 여러 해 동안 칭얼대는 걸 다 들어주었던 친구들에게 미안하고 고맙다. 겨울은 참 묘하다. 시작에 가까운 어디에 있는 계절. 7년 전, 새 세계로 뻗어갈 때 내가 간직했던 마음들이 떠오른다. 눈은 그쳤고, 아무 것도 모르던 중학교 시절의 친구들은 새 출발을 기대하며 각자의 길로 떠났다. 

 채찍질하지는 말고 쉽게 꺼지지 않는 열을 만들기 위해, 천천히, 끝까지,





어두운 언덕을 올라 집으로 가는 길
누가 떨어뜨린 담뱃재
아니 재라기보다 불씨
떨어뜨렸다기엔 바닥에 닿지 않은,
언덕도 흔드는 강풍에 날리면서도
선명하게 빛나던

오초

끝내 저버릴 줄은 몰랐던
불꽃 아니 불똥
밤새 헤매게 했던

-어느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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