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2006년에 나왔을 때부터 이 연극을 얼핏 들어는 봤을 것이다. 나는 다만 386세대 우는 소리 같은 것들이 그리 반갑지 않아서 스쳐지났을 것이다. 이번에도 거의 스쳐지나듯 지나가다가 검색 중인 다른 연극들에 비해서는 계속 마음에 남는 듯한 느낌이 들어 결국 보러가기로 했었다.
오늘의 책은 신촌에 있다 사라진 사회과학서점의 이름이다. 그곳에서 책을 읽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 초년 시절 무언가 다른 세상을 만들어 보겠다고 떠들고 행동하던 국문과 91학번 동기들이 그 중 한 명이 새로 연 헌책방 오늘의 책에 모인다.
부채 의식이라는 것. 우리는 무언가 다른 것을 위해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답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 나의 생도 남의 생도 어쩔 수 없다는 것, 그 와중에 누군가는 그것을 위해 살아주기를 바라는 것, 그런 것들이 일상적인 대화와 웃음 속에 지나간다. 책제목으로 농담을 하고, 어린 시절 실수들로 서로를 면박을 주는 가운데, 모두에게 남아있는 부채감.
나는 학생운동을 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내 주변엔 늘 어떤 종류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술자리의 대화도 그와 무관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미안해하기 시작했다. 이유도 대상도 불분명한 미안함이었고, 또 누군가에 기대는 기대도 있었고, 스스로는 부끄러웠지만 어떤 게 맞는 것인지 몰랐다. 연극이 처음 나온 때에 봤더라면 그런 생각들을 시작하지 않았을지는 확실치 않다.
십여 년 전의 그들의 고민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이 단순히 운동을 다루었다는 데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꿈, 이제는 그 의미도 잘 모를 꿈이라는 것이 있었던 것, 그리고 그것을 잊지는 못해도 조금은 비껴갈 수밖에 없었던 것, 그 이유로 남탓을 하기도 하고 내탓을 하기도 하면서 생은 나아가고 있었다는 것, 해서 그것을 다시 마주했을 때 드는 낭패와 죄의식 혹은 당당함. 때문에 나는 연극을 잘 보았던 것이다.
끝내 본 공연이 올라가지 못했던 창작극 동창은 이 시대 젊은이의 죽음을 이야기했다. 그들이 다시 모여서 하는 이야기는 걱정이고, 외로움이고, 흔들림 뿐이었다. 그들은 꿈도 없는가, 란 이야기를 누군가 했었다. 흔들리던 그때는 머리로는 알아도 쓸 수 없었는데, 앞으로는 쓸 수 있을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 그 극을 수정할 수 있을 것 같다.
한참을 비판과 풍자와 고발의 주제를 신선한 형식으로 담은 회곡들로 구상해 왔었는데, 연극을 보고나서 보다 솔직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소하고 별다를 것 없는 이야기라 생각해 잠시 묻어두고 있던 내 이야기부터 진하게 만들어 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들의 꿈이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난 이 연극이 참 고맙다. 많은 이의 가슴에서 아프게 사라져 갔을 '오늘'의 책을 다시 연 그 마음이 참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