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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학기 끝

by 가라 2011. 6. 21.

학기가 끝난진 며칠 되었지만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느라 정신이 없었다

1
시험 준비는 할 게 많지 않았다
두 과목 밖에 치지 않는 상황
공연이 끝나고도 여유만 부리다가 시험 전날을 맞이 했다
많지 않은 내용도 안 하다보니 쌓여 있어서 밤은 깊어갔다
열람실 밖으로 나와 중앙광장에서 맞는 여름 바람, 보름달에 가까워지는 달이 마음을 평안케 했다
모든 게 마지막이라는 생각, 지난 8년이 지나가고 앞으로의 몇 년이 걱정되는 시간
그 중에 찾는 여유, 다 떠나보냈다. 전역하고 1년, 미칠 듯이 달려왔던 시간, 끝이다
의무감이여 안녕, 미루고 미루었던 것들을 하나씩 해야지

시험치기 직전에 집에서 공부하기도 귀찮아서 돌벤치를 찾아갔다
돌벤치에서 부는 바람, 하늘을 덮고 있는 푸른 나뭇잎들, 날아다니는 벌레들
눈부신 하늘
에 저학년 시절 자주 찾던 이 공간이 이렇게 좋았나를 새겨보았다
그야말로 시간들이 끝나갔다

2
시험 기간의 가장 큰 위협은 100회 공연이었다
파국으로 치닫던 선후배 합동공연
76학번 선배의 제안을 차마 내치지도 수용하지도 못했는데
나는 공연에 참가하는 것처럼 되어 있었고
나는 미칠듯이 꼬여버리는 1년의 계획에 답답해했다
며칠 간 회복세에 있던 위염이 순식간에 악화되었다
그 와중에 선배들이 재학생 공연으로 상황을 넘기기로 했다는 식이 되었고
나는 마음 편하게 공부나 해야겠다 싶었다
마지막 시험 전날은 공부가 도저히 되지 않았다
미루고 미루었던 것이 다 끝나는데
8년의 기억이 다 섞여들면서 도저히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일찍 자고 아침에 일어나려고 하는데도 잠에 들질 못하고, 정말 겨우겨우 시험을 끝냈다
일찍 자려던 차에 걸려왔던 선배의 전화는 무시했었는데
마지막 시험을 끝내고도 그게 걸려서 마음이 유쾌하지 못했다
그 사이 전해 들은 선후배 합동공연의 결말은 파국이었다
완전히 돌아서버린 모습들에 안타까웠고
특히나 이런 걸 알면서도 학기 중에 공연을 시도했고
선후배들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못 했던 것에 대한 죄의식 같은 게 남았더랬다
어제의 선배에게 전화를 해서 상황을 듣고, 재학생들의 사정도 듣고
괜히 중간에 끼여 들어서 이 얘기 저 얘기를 해댔다
친구들을 만난 다음날에도 어김없이 전화가 걸려왔고
이 안타까운 상황에서 내가 뭔갈 해주긴 해야될 느낌이면서도
역시 괜히 깝치는 느낌이었다
재학생들끼리 준비하는 공연의 대본 선정에 도움을 주기로 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도 뭔가의 업무는 남은 상황이었고
재학생 연출도 하겠다 말겠다 하는 와중에 겨우 어제 다시 바뀌어 버렸다
불안하지만, 내가 불안해할 필요는 없을 팀이 꾸려진 것 같다
내 갈 길을 가도 될 것 같아 이제야 긴 시름을 놓는다

3
토요일에 13호 친구들을 봤다
새로 연 힘찬이 스튜디오
힘찬이는 순수한 친구들을 만나서 좋다고 했지만
누군들 그런 마음이 안 들었으랴
믿을 사람 없어지는 나이들에
의지할 수 있는 건 친구 뿐인가
이제 각자의 인생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 같다
생각도 다르고 성격도 다른 이 모습들에도
옛 친구라는 단어가 주는 깊은 느낌은 지워지지 않는다
사진도 찍고 노래도 부르고
피곤했고 그 이후 몸 상태가 계속 안 좋지만
그날 느낀 기묘한 기운이 아직 남아 있다

4
일요일엔 배신 팀과 함께 대학로의 배신을 보러 갔다
무려 첫 연출을 했던 혜화동일번지에서 올라가는 공연이었다
여러 과거가 다 떠오르는 시간이었다
연출적 역량에서 역시 나는 모자라구나 싶은 가운데
우리가 겪었던 문제를 그들도 똑같이 겪은 걸 보면서 역시 어려운 작품이었구나 싶었고
우리가 더 잘한 부분도 제법 있었다는 점이 좋았던 것 같다
합평회는 목요일에 하기로 했다
그러면 정말 끝이다
집에 바로 오기가 싫은 가운데 버스를 잡아타고 거리를 부유했다
1년을 멀리 했던 신촌 홍대 지역을 돌아다녔다
1년간 지독하게도 살았구나
잊으려 하던 기억들과의 조우

5
어제는 그 긴 고뇌의 시간들이 끝나는 느낌이었다
극회에 대한 고마움과 부채감들, 힘들어하는 어린 집행부들의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이제 멀찌감치 떠나있어도 필요한 게 있으면 알아서 나를 찾아줄 연출이라 노심초사할 필요도 없다
다음 주부터 영어 공부와 운동에만 신경 쓰자. 희곡도 나를 찾아오리라
집 앞에 뚫린 정릉천 산책로는 청계천까지 뚫려 있다
그동안 한 번쯤 가고 싶으면서도 피곤해서 안 갔었는데
모처럼 오래 걸어보았다
쭉쭉 걸어내려가니 4,5년 전 산책하던 청계천 끄트머리 산책로까지 나왔다
그때 품던 마음과 방황들을 떠올려 보았다
한강 가서 맥주캔 까먹던 시간들도 생각났다
마장동 축산물 시장을 지나니 죽은 고기 냄새가 진동한다
새롭지 않으나 새로운 그 길들을 걷는다
그런 길은 걷고 싶지 않았던 지난 1년을 돌아본다
나는 어디로든 갈 수 있다
익숙한 길이 싫었던 것 아닌가
내가
걷는 곳이 길이 되리
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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