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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대구

by 가라 2012. 5. 2.

막차를 타고 동대구역에 내리니 자정을 넘겨 1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걸쭉한 사투리로 나를 맞이한 택시 기사는 아버지보다도 높은 연배였으나 깎듯이 나를 대했다

그가 나의 어린 날 어머니 손 잡고 탄 택시의 기사였다면 마흔을 갓 넘겼을 때였겠지

박정희와 전두환의 임기 사이에 군대를 갔다는 그는 광주 이야기를 했다

간첩 비슷한 사람으로 여겼던 삼청 교육대에 기껏해야 머리나 기르고 다녔던 자기 동생이 끌려갈 뻔했다는 데에서 그는 묘한 의문을 가졌던 모양이다

스무살 팔팔한 때 서울에 가서 대구 사람이라고 하면 밥도 사주고 술도 사주고 해서 박정희라는 대통령의 힘이 마치 자기 힘인 것처럼 착각했었다는 그는 당시만 해도 광주 사태라고 알려졌던 5.18의 실체가 궁금해 몇 번이고 광주의 전남도청을 찾았다고 했다

젊은 시절의 그가 느꼈던 힘을 그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는 그저 습관적으로 여권을 밀어주는 대구 사람들을 보며 비전이 없다고 말하는 그는, 정치에 있어서 거의 죽은 도시라고 생각하고 있는 나의 고향 대구에도 의심을 품은 자들이 있다는 것에 신선함을 느꼈다

신천대로를 달리며 듣는 대구 사람의 이상한 정치 이야기가 이삿짐을 나르러 대구에 온 나의 첫 만남이었다


막 자려는 도연이, 자다가 깬 어머니, 씻으려고 할 때 들어온 술 취한 아버지와 짧은 인사를 나누고 잠에 들었더니 열시간을 꼬박 잤다

점심을 먹고 짐 정리를 하는데, 이십년 묵은 기억들이 올라온다

지금은 이사 갔을 어릴 때 친구들의 연락처, 이름을 전혀 기억할 수 없는 사람들이 남긴 롤링 페이퍼들, 어릴 때의 숙제, 글들, 시험 문제...

십이년을 살았던 집을 정리하는 것이지만 이미 집 떠나 살던 나에게 그 집에 대한 애착은 별로 없지만, 묵은 책들과 CD와 구슬, 팽이, 장난감들의 흔적들까지 보는 감회가 이상했다

이런 것들은 버려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일까

남기고 싶은 잔해들이 많았지만 이사 갈 집에 내 짐을 묵혀둘 공간이 많지는 않다

그럼에도 여러 글들과 자료들과 책들을 남겨 부모님이 고생하겠네, 하필 어버이날에 이사를 하시다니


씻고 저녁을 먹으니 금세 하루가 가버려 나는 또 서울행 기차를 탔다

만 하루도 머물지 않고 떠나는 길

안정되지도 않고 돈벌이도 거의 없는 일을 하는 나를 보는 부모님의 걱정을 생각한다. 경제적으로라도 완전히 독립해야 할 텐데. 글을 열심히 써보면 좀 나을까

올라오는 길에는 비가 내렸다

비내리는 밤 열차에서 차창을 보며 음악을 들으니 물방울과 함께 뭔가 떨어지는 기분이다

만나고 있는 친구와 연락을 나누다 집으로 돌아오니 자정

빨래를 마치고 자야지

트레이닝도 끝나고 내일부터는 본격적인 과부들 타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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