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친구들의 생일이었다
두 번의 저녁을 먹었고 1년 만에 영화관엘 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홍대를 지나 막차를 차고 집으로 온다
비 오는 날 밤 버스 안에서 골라 놓은 노래를 들으며 차창을 바라본 게 얼마만인가
정릉천을 뛸 때마다 스멀스멀 옛날 추억에 잠기는 것과는 사뭇 다른 마음들이 지나간다
어제는 3년 전 광화문 거리에서 함께 마임을 했던 마임이스트를 만났다
어제 들었던 자연이란 말은 뜬구름 같은 이야기였는데, 죽음에 가까워야 예술이 나온다는 그 말들이 너무나 삶과 유리된 느낌이 들었었는데
세상을 따뜻하게 볼 수 있었을 때 나는 내 스스로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눈치를 보고 인정을 바라고 누군가의 간택을 기다리며 갖은 아양을 떠는 지금의 나는 행복하지도 않고 자신감도 없다
무엇을 해야 맞는 건지 모른채 끌려가고만 있다
나 스스로를 인정하지도 못하고, 완전히 버리지도 못한 채 갖은 타협점만 모색하면서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는 노화
솔직하게 나를 드러내지도 못하는 건, 내 속에 비장의 카드가 있어서가 아니다
부끄럽기 때문에
멋있지 않기 때문에
나의 새로운 감투가 멋지고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다
끌려 온 주제에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고 납득할 수 있는 그 수준이 될 때까지만
나이는 먹어가고 세상의 기준에 따르면 나는 점점 패배자와 비슷한 몰골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 따위 시선들에 얽매이면서 내가 행복할 수 있을까
새파란 후배들을 누르고 올라서면서 학점을 세탁하고, 토플 수업을 듣고, 자랑스런 한국어를 가르치는 기술이라도 얻어보려고 꾸역꾸역 강의를 듣는 이 내 모습은 역겹지 않은가
후배들 앞에선 뭐라도 아는 것처럼 떠들어대고, 정작 너는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한마디 대답도 못할 치졸한 내 모습은
더럽고 치사한 세상이 가해자이고 연약한 세상의 부품들은 막연한 피해자로 늙어가는 것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성공은 지극히 우연에 의한 것이란 것을
지금 시대에 인정받을 수 있는 재능을, 그것을 갈고 닦을 시간을 우연하게 갖게 된 이의 것이란 것을
모르는 것 아니지 않나
타인의 시선에 언제까지 휘둘릴 텐가
그까짓 세상은 더러워서 버리는 것이다
나타샤야 당나귀야
그 정돈 아니야,라고 자위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나를 버리고
내 속엔 어느 새 꼰대가 뿌리내리려 한다
세상을 보는 표독스런 고집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점차 편견과 아집과 세상의 기준에 잠식되어 가고 있다
잃을 게 없는 사람은 어디서도 당당할 수 있다
나는 무엇을 잃을까봐 두려운가, 누군가 나를 불러주길 간청하고 잇는가
나는 그냥 나이지 않나
지금
여기
있지 않나
나를 몰라주는 사람이면 어때
내가 나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있다면
누구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다면
기왕 버린 거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려 들었다
어린 시절의 객기와 꿈으로 치부하려 했다
단지 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할 뿐이라고 생각하려 했다
아니다
그 어떤 생각도 철학도 없이
모든 게 염세적이고 무의미한 것으로 끝낼 거라면
목숨이 붙은들 내 삶이라고 할 수 있는가
수학을 선택했다면 이런 고민들 하지 않고 취직을 하든 대학원을 가든 뭔가는 했을 거라고
이런 고민 안 했을 거고, 그러면 됐을 거라고
그 따위나 되새길 거면 나는 왜 이런 선택을 했나
누가 뭐라고 해도 그 하찮은 세상의 눈깔들에 대답할 가치도 못 느끼면서 웃어줄 수 있을 그 자신감 하나면 살 수 있지 않을까
끝까지 가보지도 못하고 늘 타협의 줄다리기를 했다
끝 간 데 없이 치솟아보지도 못하고 부정적인 판단만 하려 들었다
위선, 가식, 인기, 허세, 그 따위야 아무렴 좋다
운이 좋으면 돈이 따라올 수도 있고 명예가 붙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그게 또 어떨까
배가 부르면 맛을 찾고 인간의 욕심은 어차피 끝이 없는데
비웃음이 두려운가, 나도 같이 비웃어주자
부모님과 가족의 핑계를 대며 자연스럽지 못하게 살아온 시간들이여
미안하고 죄송스럽지만 내 선택이 결국 나를 살게 하리라
방황은 올해로 끝이다
훠이훠이
훨훨
지나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