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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시험 기간

by 가라 2011. 4. 16.

20일부터 있을 중간고사를 맞아 수요일부터 연극 준비 일정이 휴식에 들어갔다
그러나 근 열흘을 괴롭혔던 영국희곡 발표가 어제 끝날 때까진 빡빡한 일정의 연속이었다
후배들이 가득 차 있는 강의실에서 후크 선장 연기도 하고 생난리를 쳤다
준비가 잘 안 되고 있어 걱정이었는데 막판에 그래도 집중해서 어느 정도 발표 비슷하게는 했지만
끝나고 나니 참 허망했다. 내 기준에선 아무래도 어설픈데도, 학부생 수준으론 무난한 것이긴 한 것이라

발표 준비 중이었던 점심 시간엔 갑작스럽게 환희를 만날 수 있었다
성일이와 아현이도 보았다
눈가에 주름들도 잡힌 모습이 마냥 어리기만 했던 10년 전 모습들이 아니다
여러 이유로 아직까지 학교에 남아 있는 친구들끼리 나누게 되는 기묘한 감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발표를 끝내고는 그동안 미뤄두었던 생필품 보충을 위해 홈플러스를 갔다
가는 길엔 벚꽃이 피었다. 학교에만 있어 벚꽃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봄은 이런 것이었지 싶은 여유가 느껴지긴 했는데
그동안 배우 스케줄과 스탭 제작회의와 조모임들의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다가 끝이 나고 보니
맥이 풀렸다, 이상한 우울이었다
담쟁이 덩굴이 기어오르고 운동과 산책을 하러 나온 사람들이 틈틈이 보이는
이 턱없이 여유로운 천변의 풍경은 나를 더 숨막히게 했다
그 감정의 원인을 좀체 알 수 없었다
흔히들 인생에서 청춘이라고 부르는 시기가 끝이 나고 있다
나는 이번 공연 이후엔 어떤 공간이든지 생존이 걸린 경쟁과 암투의 장으로 나서게 된다
지난 학기까지 잃어가고 있던 여유, 순진함, 청춘 따위를 다시 찾은 것 같지만 어쨌거나 이게 마지막인 것.
하필 피터팬에 관한 발표를 준비하고 있어서 더 우울하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피터팬에서 작가가 싣지 못한 두 번째 이야기까지 포함하면 피터팬은 유년 시절에 대한 환상이나 노스탤지어가 아니라 엄격한 가정 교육과 학교 교육에 대해 비판하는 이야기라고 한다
그 이야길 듣고 나니 어딘가 더 씁쓸했고
정확히 어떤 인과 관계와 맥락에서
기묘한 그 우울이 매끄럽게 설명이 될지 몰랐다
긴장이 풀리면서 피로가 몰려왔고 모처럼 잠을 편하게 잤다

오늘은 연극을 한 편 봤다
계속 연극을 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갖고 있는 시점에서 보는 연극
관심을 끌고 있다는 연극이라 그런지 공연 후의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서 연출은 다리를 꼰 약간은 거만한 자세이고
나보다 한 살 어린 작가는, 나보다 어린 것과는 달리 나이 든 목소리 톤을 갖고 있다, 나도 이미 그렇게 되어 있는데 몰랐던 것이다
지난 해에 워낙 좋은 작품을 많이 봐서인지, 대학로에서 떠오르는 작품은 시시하게 느껴진다
나라도 극장 상황만 좋으면 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생각이 들고, 또래의 작가가 쓴 극은 내가 늘 깊이가 없다는 생각에 쓰기를 주저하는 방식으로 완성되었다. 어쨌거나 창작극으로서 흥미있고, 주제도 있는 편이었겠지만, 늘 내가 느끼는 그 한계들 역시 갖고 있었다
그런데 연출은 어딘지 아래를 보고 있는 느낌이다
그냥 그 광경이 참 이상하게 생각됐다
연극을 한다면 나는 이런 환경에서 뭔가를 할 수 있을까
잡아먹히거나 물들어갈까, 내가 추구하는 뭔가라는 게 있을까

무엇이건 해야 한다. 나는 왜 늘 뭔가를 했을까. 허무가 찾아오는 그 순간이 너무나 견디기 힘들었던 탓일까
사실 이번 학기가 끝나면 내가 가고 싶은 길은 조금 바뀌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자꾸 하고 있다
그거야 아무래도 좋다
일단 한 시름 놨으니 서서히 각색이며 무대, 조명 구상이며 시험 준비며 해 봐야지
이번 연극은 두 번째 연출 때처럼 이후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첫 연출 때처럼 막다른 곳에서 하는 느낌이다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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