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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야비군

by 가라 2012. 9. 6.

짬내나는 국방색 군가가 연병장에 울려 퍼지고

군복만 입으면 병장 계급장 밧데리가 꽉 차서 무거운 탓인지 기운이 빠지는 예비군들은 여기저기 맥없이 앉아서 졸거나 몰래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훈련장 데코레이션으로 꽂아놓은 타이어들 틈바구니에서 자라나는 풀을 보며 너는 왜 여기 있니, 개미야 너는 여기 대체 무슨 볼 일이니,를 묻다 보면 얼추 신원 확인과 병기 지급이 끝이 난다

햇빛 나면 덥고, 비 오면 눅눅한 기분에, 어쨌거나 저쨌거나 힘이 빠지고

교관인 향토예비군 동대장의 확성된 짜증에 너나 할 것 없이 귀차니즘만 커져가고, 어리버리한 현역 기간병 조교들을 보며 올챙이적 생각들 못하고 피식피식 웃어대면서, 일 처리가 수월치 못한 데서 오는 짜증도 적잖이 느낀다

하는 일 없는 예비군 훈련을 잘 받기 위해선 적어도 남들만큼만은 널널해야 한다

알량한 예비역의 반항심이란 것도 고무링 안 차고 훈련장까지 왔다가 부대 정문 코 앞에서야 링을 차고 상의를 하의 안으로 집어 넣는 것, 헬멧 쓰라고 소리치는 교관이 나에게서 멀어지는 걸 보고는 슬그머니 다시 헬멧을 벗는 수준의 반항에 지나지 않는다

군 생활을 잘 하는 비법은 중간만 하는 것이다. 때가 되면 알아서 진급이 되기 때문에 남들보다 잘해봤자 할 일만 많아질 뿐이고, 남들보다 못하면 갈굼이 시작되니 고생길이다

예비군 번호를 받아오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평균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애를 쓴다 

일의 자리가 1이 나오면 분대장이라 책임질 게 생겨 큰일이고, 앞 번호는 훈련을 더 많이 받을 수 있고, 뒷 번호는 퇴소 시간이 늦어질 수 있기 때문에 중간의 적당한 숫자를 받고 싶어 미묘한 심리전도 생긴다. 1번이라도 되는 순간 하루 종일 깃발 들고 다니느라 귀찮아진다

부대 마크와 명찰의 색깔, 계급장의 차이를 보고 서로 간의 군생활 난이도에 관해 지레짐작하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 훈련을 받는 삼일 동안, 현역 시절에 해병대였건 공익이었건 부사관이었건 병역특례였건, 모든 예비군의 생각은 한 마음 한 뜻으로 모아진다


잠 오고 귀찮다. 빨리 끝내고 집에 가자


잠 잘 시간은 참으로 많다. 서 있는 시간은 사격, 전술 훈련, 시가지 전투 정도가 있는데 그마저 자기 차례가 아닐 때는 앉아서 대기하기 때문에 3분 거리에 있는 훈련장들을 서로 이동할 때를 빼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앉아서 보내고 보니, 이 훈련의 정체가 대체 무엇인지 회의가 들게 된다. 앉아 있는 시간에는 대부분 잠이 오고, 앞에서 뭔가를 열심인지 대충인지 설명하고 있는 동안 자고 자고 또 자도 하루가 쉽게 끝나지는 않는 상황이 반복된다

내가 이번 예비군 훈련에서 한 일이라곤 사격장에서 처음 보는 칼빈 총으로 총알 여섯 발을 쏜 게 다였다. 전술 훈련은 교관도 귀찮은지 다 안 하고, 페인트볼을 쏘는 서바이벌 시가지 전투도 앞에서 세 줄만 하고 끝이 난 덕이었다. 어제는 비도 왔고

이럴 거면 예비군 훈련을 왜 이렇게 길게 할까, 싶지만 이 시간 동안 예비군에게 주는 학습 효과는 분명히 있다


군대를 잊고 싶겠지만 너희는 여전히 국가에 귀속된 몸이다. 우리가 부르면 언제든 와야 되는 존재란 말이다

안 오면 벌금~ 넌 이미 전과자~


라는 것인데, 아직도 이 년 간의 군 생활을 초월하는 몇십 년의 시간이 이어질 것만 같은 우울함을 안고서도, 훈련 일정이 다 끝나고 나면 '까짓 거 별 거 없네. 자 이제 X 년만 더 하면 돼" 라고 불쌍한 자족감을 느끼며 생업으로 복귀하는 것이 바로 예비군의 본령인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너는 진급, 시간이 지나면 너는 전역, 시간이 지나면 너는 동원 끝, 시간이 지나면 너는 민방위, 시간이 지나면 너는 비로소 자유......일 것 같니? 넌 이미 세금과 적금과 보험과 카드값과 진급 혹은 해고에 대한 걱정의 노예가 되어 내 가족의 안녕과 자식들의 호위호식을 위해 몸바쳐 일하고 있겠지요

징병제에서 비롯되는 군사주의의 국민성은 이렇게 저렇게 재생산, 반복되어 삼천리 강산에 길이길이 기억되리랄랄라


어쨌건 하나 끝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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