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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秋夕

by 가라 2012. 9. 30.

나날이 쇠약해지시는 할머니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할머니는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시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집에서 마지막 차례를 지냈다

5월 달력이 걸려 있었고, 두 대가 있던 티비가 사라졌다

봄까지의 마지막 흔적들이 마음을 어둡게 했다, 치약이 떨어져 많은 사람이 양치를 못하고 성묘를 갔다

이제는 익숙하게 나와 사촌 형이 차를 몰고 가는 성묘길

어려운 경제 사정에 뭔가를 물을 때마다 애들은 몰라도 된다고 하셨던 아버지는 요즘 옛이야기를 자주 하신다

솥 만드는 동네라서 솥계라고 불렸던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에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 

건너마을 부잣집에서 가난한 집안으로 시집 왔던 할머니 이야기


어렸을 땐 1~2주에 한 번씩 아버지 형제 가족들이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모였다

명절 때는 이박 삼일 혹은 삼박 사일 내내 대구에 있던 그 집에 머물렀다

시끄럽고 북적대던 그 일상이 며느리들을 참으로 힘들게 했을 테지만

나를 포함한 동기 사촌들에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풍성했던 유년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사촌들이 대구를 떠나고 우리가 모여야 할 집은 이제 어디인지

투명한 시내를 건너 산소로 이동할 때, 저 시냇가 한 켠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더불어 온 식구가 고기를 구워먹던 기억이 떠올랐다

여러 바쁜 사정으로 그 길에 함께 하지 못한 사촌과 동생이 있어, 그런 기억들은 더 아득하게 떠올랐다


할아버지의 옆자리... 그 곳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

살아 말년에 화합하지 못했던 두 분은 저 곳에선 화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다 어디로 이렇게 뿔뿔이 흩어지고 있을까


병원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 아무도 언급하지 않지만 모두가 예감하고 있는 그 불길한 징조

각기 다른 사정으로 실려있는 환자들, 그들의 가족들

아직 할머니의 눈은 말하고 있다


돌아오는 기찻길에 음악을 듣는다

그 음악을 즐겨 듣던 때의 생각, 감정들이 흐르면서 많은 얼굴들이 지나간다

대구에 내릴 때면 늘 드는 이상한 안도감, 사람들이 내 생각과 이야기들을 사투리로 편안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 나도 저들과 함께 자라났던 곳이라는 생각, 이 지워지는 순간은 돌아오는 기차 옆으로 전철이 지나갈 때이다

다시 왔구나


감상을 완전히 깬 건 너무나도 익숙한, 대합실에 들어설 때의 풍경이었다

퇴근길과 똑같은 그림에 내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건지 고향엘 다녀 오는 건지 헷갈렸다


달은 휘영청 이쁘게도 떴다

실컷 듣기만 하고 이뤄주지도 않는 달에게 뭔 소원을 또 빌어야 할까 

옆방 사는 남자는 불을 다 꺼놓고 혼자 티비를 보고 있었다


또 한 번의 가을밤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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