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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주말

by 가라 2010. 8. 22.
이사와 전역과 연극 연습과 과외를 비롯해 집에 등장한 각종 벌레로 인한 수면 부족으로 정신 없는 일주일이 가고 모처럼 휴일을 맞이했다. 앞으로 2주 후 공연이 끝날 때까지 온전한 휴일은 없을 예정인데 나쁘진 않다. 다음주까지 과외를 하고 쉬기로 했고, 적응하느라 시간이 가는 중에 어느덧 공연이 코앞인 연극도 금세 끝이 나게 되어 있다. 바깥 생활에 적응하는 기간이라 생각하고 조금만 달려보자. 무엇보다 좋은 것은 바빠도 내가 하고 싶은 일로 바쁘다는 것인데, 이런 기쁨도 얼마나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지금은 이 바쁨도 나쁘지 않다

예전엔 시간이 날 때면 어디든 새로운 곳을 찾아보지 않고는 못 배겼다. 온갖 감상에 다 젖어서 돌아다니다 집에 돌아오면 또 온갖 감상으로 새벽을 보내고는 잠에 들기 일쑤였다. 답을 찾고 싶었던 방황의 긴 시간들이었다. 어디에도 답은 없어보였고, 무엇을 해도 허무하지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완벽한 미래는 만들 수 없고, 세상은 의미 없다고 믿으면 허무한 무질서의 세계일 뿐임을 알더라도, 또 다른 믿음 아래에서 그 세계를 의미있게 만드는 나와 우리의 시도라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하고 나니 굳이 온세상 걱정할 배부른 이십대의 초반은 끝이 났던 것 같다. 이후엔 진로 문제만으로 미칠 것 같은 방황이 길어졌고, 지금도 완전히 구체적인 진로가 모색된 것은 아니지만 차차 찾아갈 수 있게끔 준비를 해나가면 되지 않을까 싶은 전역 전의 낙천성이 돌아오고 있다

이 여유가 그렇게나 그리웠다. 한 번에 이것저것 다 시도하면서 바쁨 속에서도 큰 의미를 찾던 이십대 초반과 달리 요즘은 한 번에 여러가지를 해내질 못한다. 심지어 누군가의 부탁으로 보관해 놓고 있는 물품도 하루 빨리 전달해주려고 안달이 나있기까지 하는 등 한 번에 할 수 있는 고민과 행동을 최소화하려는 발악이 있다. 시작은 반이고 계속 가는 것이 나머지 반이다. 시작은 이제 충분히 했고, 숙련이 되도록 갈고 닦아야 한다. 해서 지금 나의 메인은 연극 준비와 과외 뿐이고, 전역 후 그동안 나의 행보 역시 집-학교-과외-집을 벗어나지 않고 있고, 아쉬움도 없다. 그동안 못했던 일들이 너무 많아 하나씩 하다보면 올해는 다 갈 것 같다. 예전엔 목표가 많아도 다 이룰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사람 몸은 하나고 할 수 있는 것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는 것을 보면 무조건 뛰던 예전과도 달리 바로 코앞에서 신호가 바뀐 걸 보고도 기다리려고 할 때가 생기는 걸 보니 뭔가가 바뀌었구나를 느끼게 된다

쉬는 날이라고 해도 별 게 없고, 모자란 잠을 보충하고, 과외 준비로 공부를 하고, 배우 역할 분석을 하는데 시간을 쓸 수밖에 없다. 그마저도 하향 조정했던 목표까지 이르지 못했다. 잠이 부족했던 탓으로 돌리고, 내일 마저 마무리하게끔 해야지. 털레털레 캠퍼스를 돌다보니 해질녘이 되었다. 지난 해 이맘 때에는 용산 캠프에서 보았던 석양. 그때 꿈꾸던 자유의 미래가 여기 오긴 와있다. 바람도 한번씩 부는 것이 곧 가을이 온다. 올 가을엔 쉬고 싶단 생각도 든다. 조용히 책이나 보며 글이나 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공연을 올리고 싶은 마음도 크지만 그게 나을 수도 있다. 물론 그 와중에 여러가지 계획 하에 공부가 진행되어야 하니 그리 여유가 넘치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것들로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바람결에 많은 생각이 지난다

저녁은 집 앞에서 콩나물황태해장국을 먹었다. 그것과 마늘장아찌를 먹는데, 이런 음식이 참 먹고 싶었던 것이었다. 기름진 음식들엔 질린 감이 있다. 이 생활은 어딘지 비현실적인 감이 있다. 지난 달까지 나는 정신없이 순찰을 돌았다. 공연이 끝나면 상념이 많아질 텐데 그게 큰일이다. 상념이 길어져도 술자리에서 밤을 새도 결론은 나질 않는다, 세상은 무의미하고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때문에 일정을 잘 만들 필요가 있다. 할 일들을 잘 계획해서 하나씩 진행해야 한다. 공부도 필요하고 극도 써야 하는데, 의외로 시간은 많지 않다. 자금의 압박을 벗어나기 위해선 결국 어떤 형태의 취업을 준비하기도 해야되나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다. 해야할 일과 나중에 하든가 안 해도 될 일을 구분하는 일을 공연이 끝나기 전에 어느 정도 마쳐야 하는 것도 있다. 차분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바람이 선선하고, 집 주위는 이전에 살던 곳들과는 다르게 여유가 넘친다. 기숙사는 언덕 너머에 있었고, 경희대 앞엔 역시 학생들이 많았다. 공단 옆에 있던 시흥에는 얼굴 볼 일도 없는 노동자 이웃들이 많았다. 그런데 역세권에 있는데다 학교에서도 코앞인데도 분위기는 완전히 다른 이 지역은 낡고 오래된 곳답게 오래된 이웃들이 함께 한다. 이 낡은 골목길에서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일로 바쁘거나 느긋한 것을 본다. 어딘지 어린 시절에 살던 골목에 든 것 같아 정감이 든다. 어두운 집 주위를 도는데 골목에 의자를 끌고 나와 모임을 갖고 있는 노파들의 얼굴에 근심이 없다. (가려졌겠지 물론) 예전엔 늘 어두운 면만 보려한 게 아니었나 싶다. 이런 느긋한 구보를 하다보면 유년 시절이 떠오른다. 모처럼 외식을 나가 다섯 식구가 배부르게 먹고는 털레털레 아이스크림을 먹고 돌아오다가 공원엘 들렀다 집에 온다. 그 공원과 놀이터의 밤이 생각날 때가 가끔 있다. 집을 떠난지 10년이 되었으니, 그 기억들도 10년이 넘어간다

해서 할 일들은 많고, 걸러낼 일도 많고, 내일은 과외 보충을 갔다가 저녁 내내 영어 공부 약간과 연극 준비를 하면 된다. 연극이 끝나면 나의 계획들이 실행에 옮겨질 일이니 계획을 잘 세우는 게 중요하다. 해가 뜨기 전에 어서 자야 내일 과외를 멀쩡하게 가겠네. 어서어서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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