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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외 완료

by 가라 2011. 3. 23.


 지난 월요일에 세 명의 배우를 포함한 여덟 명의 참가자가 모였다. 리딩과 간단한 토론, 술자리가 이어졌다. 다음 주부터는 본격적으로 연습이 시작된다. 과연 이 일이 어떻게 될까 하는 두려움들이 조금씩 읽힌다. 나에게도 일정 부분의 두려움은 있지만 크게 발설하지는 않는다. 깊은 곳에 있는 믿음이 우리를 어딘가 의미 있는 곳으로 이끌 것이라는 것은 믿는다. 공연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영원한 믿음은 없다. 단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함께이고 어떤 공통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감동받게, 살아있게 한다

 학부 수업은 이제 정말 못 들어줄 지경이 되었다. 영문과 수업을 신청해서는 영작 연습도 되리라 생각했는데 정작 발표문들도 한국어로 쓰고, 외국어 텍스트를 읽다보니 국문과 수업에서보다는 논쟁의 질이 높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후배들이 진행하는 발표 수업들은 정말이지... 나름대로 고민들이 있었고, 열심히들 한다고 생각했겠지만, 글쎄, 학교를 너무 오래 다녔다 나는. 여전히 처음 접하는 강의 주제와 텍스트 읽기, 나름의 관점으로 글을 쓰기 따위의 일에는 신이 난다. 그러나 학생 수준에 따라 강의 질도 달라질 수밖에도 없기에 여러모로 아쉬운 게 많다. 확실히 학부 생활은 이게 끝이다

 정말 이건 마지막이다.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참가자들의 들뜬 모습들을 본다. 이 유쾌함은 좋다. 그러나 여기에 젖어들었던 과거처럼 갈 수는 없다. 들떠있을 땐 가라 앉히고, 침울할 땐 열기로 채워야 한다. 중심을 잃지 않고 가야하며 해야할 말과 안 할 말을 구별하고 그 말하는 적절한 타이밍을 찾아야 하는 것이 연출의 역할이다. 감정 표현은 전략적이어야 하며 감출 수밖에 없는 복잡한 감정 탓에 필연적으로 외로운 작업이다. 그럼에도 저 속 어딘가에서 스물스물 끓어오르는 이 열기와 냉기가 좋다. 

 모든 건 지나가고 잊혀질 수밖에 없다. 이름 석자를 남기는 건 무의미하다. 다만 이 순간 우리는 살아 있었고, 서로를 사랑했고, 미워하기도 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그때그때 각자의 마음에 새겨지는 흔적들이 있을 뿐이다. 아름다운 추억만으로 기억될 수 있는, 이제 정말 어쩔 수 없이, 마지막 공연의 리허설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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