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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연극의 이유

by 가라 2010. 1. 17.
 오늘 진규와 모처럼 저녁을 먹으며 이런 저런 자기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서로에게 자극을 주기도 했겠고 서로를 다시 세우는 시간이기도 했겠다. 진규와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느낀 묘한 공통점은 서로가 지금 하려는 일들이 각자에게 목적이라기보다는 수단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둘은 수단이라는 이야길 했던 것이다

 국문과의 송하춘 선생님은 여러 해 전의 현대소설론 시간에 그런 이야길 했다 
 "진보적이지 않은 데 예술이라고 부를 수가 있나?"
 동감은 했지만 이후에 계속해서 연극이나 음악 쪽의 활동을 해왔던 나는 그 화두에 대해서 약간의 회의감을 가져야 했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 끝날 수도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법에 맞는 표현을 해야 소통이 효과적이라는 마음 탓에 아름다움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게 있어 예술은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예술이 정답은 아니겠지만, 소통이면서 일종의 발언인 것이었다.
 
 처음에 내게 장르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어떤 수단이 더욱 효과적일까 하는 것이었다. 그 점에서 노래 혹은 음유시의 가능성은 사실 아직도 아쉽다. 연극을 하겠다고 하면서 영화에도 끊임없는 관심을 표하는 이유도 그런 데에 있다. 이제 와서 연극을, 그것도 연출과 관련한 진로를 그리고 있는 데에는 현재 음악적 재능과 내공의 문제에서 나오는 발전 가능성 부족과, 내가 가진 창조력이 가장 많이 발휘될 수 있는 분야는 무엇인가에 대한 결론인 부분도 있다. 그러나 연극을 하면서 내가 잊을 수 없는 화두는 연극이 내게 공동체의 형상화 과정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기왕에 예술 분야에 뜻을 두겠다면, 글만 써서는 알기 힘든 점들이 연극에 분명 존재한다.

  고독 속에 작가는 군림하나 허공 속에서 군림하는 것인 반면, 극장에서는 군림하지 않고 언제나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는 상호의존 관계에 놓여진다. 이것이야말로 미래 사회를 위한 좋은 공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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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은 작가가 추상화되는 것을 피하게 한다. 신문사에서 일할 때 사설을 쓰는 것보다 인쇄소 조판대 위에서 지면을 짜는 것은 더 좋아했듯이 극장에서 조명, 세트, 소도구들이 엉킨 속에 뿌리를 내리는 과정을 더 좋아한다 - 까뮈의 글에서

 극회 활동을 하면서 나는 연출 중심의 공연 시스템을 바꾸고 싶었다. 연출자는 공공연하게 "내 공연"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공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이 공연은 (연출자의 이름)의 공연이니까"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했다. 연출자는 지시했고 그 외의 참여자는 수행했다. 해서 나의 첫 연출작에서, 지시하지 않는 연출이었던 나는 참여자들의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굉장히 존재감 없고 착한 이상한 연출이었다. 나는 배우와 스텝들이 내가 원하는 걸 만들어 오기보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걸 만들어 오길 바랐고 서로가 서로의 것들에 대해 토론해서 조율해가며 내 주제 의식을 관통하면서도 각자가 수긍할 수 있는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 나가길 바랬다. 물론 나의 능력 부족으로 아쉬운 부분이 많기도 한 공연이었지만, 그때의 연극이 참여자 개개인에게 개개인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든 공연이 되게끔 노력했다고는 아직도 생각하고 있다. 다음의 공연에서 여느 정기공연과 같은 공연집행부 시스템을 취했다가(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던 건 아니었지만) 심각한 소통의 문제를 겪다 마침내 본 공연은 올라가지 못했던 경험이 있었고, 이후 극회의 큰 공연들에서 시스템의 문제에 큰 관심을 갖는 사람은 많지 않아 늘 해오던 시스템이 아직 유지되고 있지만, 정치란 '견해에 대한 동감/반감의 문제'가 아니라 '타인을 대하는 태도'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까뮈가 말하는 상호의존 관계가, 우리들이 추구해야 할 공동체 사회가 어떤 식이어야 하는가에 해당하는 고민을 계속 해야한다고 느끼고 있다.

 연극이 한편으로는 극장에 사람을 가두어놓고 일방향적으로 소통하는 장르라는 점도 항상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어디에서나 우리는 연극을, 연희를 펼칠 수 있다. 2008년 여름의 거리에서 마임극을 할 때 느꼈던 마음들도 평생 안고 가야 할 숙제이다. 갈등-다툼-화해(혹은 절망)의 구조를 가진 연극에서는 보여줄 수 없는 희망과, 삶의 태도의 변화에 대한 문제들. 소통. 그리고 현재의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의미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연극을 하면서 혹은 영화를 찍으면서 나는 현재 내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관심을 많이 두지 않았었다. 와중에 거리가 시끄럽기도 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기도 했다. 발언들이 겉치레와 허세에 머물지 않고 실천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바쁜 가운데 잊지 않기를.

 이제는 해가 갈 수록 말하기 부끄러워지는 그런 문장, 고리끼의 밑바닥에서의 한 대사를 떠올려본다. 물론 쥐뿔도 없으면서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사랑하라는 뜻이 아니라,
"내가 나를 존경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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